윤여정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오스카 수상 배우 윤여정은 늘 정답을 아는 듯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인생은 예상 밖 일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미국 <보그>가 며칠 전 그녀를 만났다. 서구의 시선으로 본 윤여정은 거침없고 명쾌하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오랜 세월 깎이고 단단해진 모습에 가깝다. 만약 영어권에 ‘내공’이라는 단어가 있었다면, 그들이 윤여정을 표현할 때 가장 먼저 골랐을 것이다.
“냄새 못 맡았어요. 전 개가 아니잖아요!”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 기자가 “브래드 피트 향기가 어땠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할리우드의 짓궂은 질문을 단번에 차단하면서도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노련한 한 방이었다. 영국 아카데미(BAFTA) 시상식에서는 영국인을 두고 “아주 속물적인 사람들(Very snobbish people)“이라고 했다. 꽤 뼈 있는 말이었지만 객석엔 웃음이 터졌다. 영국 사회가 가진 ‘격식을 차리는 잘난 척하는 이미지’를 정확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어요. 한국 시간으로 새벽 5시였거든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너무 미안했죠. 다들 정말 좋은 사람들인데.” 다만 완전히 뜬금없이 나온 말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기 펠로우로 지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육 수준이 매우 높고 엘리트라는 건 알겠는데, 약간…” 잠깐 멈추다가 웃으며 덧붙인다. “속물적이에요(Snobbish).” <뉴욕 타임스>가 “2021년 오스카 최고의 수상 소감”이라고 극찬한 연설의 주인공은 정작 이런 수상 소감이 창피하다고 한다. 이 솔직함과 무장 해제시키는 유머가 전 세계 관객을 사로잡은 핵심이다.
한국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배우 중 한 명인 윤여정은 2021년 영화 〈미나리〉에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 순자를 연기하며 서구권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고,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연기상을 거머쥔다.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역대 두 번째 여우조연상 수상이기도 하다.
이후 애플 TV+ 드라마 〈파친코 1·2〉(2022·2024), 영화 〈결혼 피로연〉(2025), 최근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 2〉까지 출연하며 할리우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성난 사람들 2〉에서는 컨트리클럽을 소유한 억만장자 ‘박 회장’을 연기한다.
윤여정의 연기 인생은 우연히 시작됐다. 1960년대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방송국에 들렀는데 어린이 게임 쇼에서 경품을 나눠줄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냥 ‘네, 할게요’ 했죠. 하고 나니까 돈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계속했어요.” 이후 방송국 프로듀서가 연기 오디션을 권유했다. 윤여정의 전공은 국문학이었고, 방송국은 영화과 학생 섭외에 실패한 상황이었다. “제 인생은 늘 예상 밖이에요.”
몇 편의 드라마를 거친 뒤 20대 초반에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1971)로 스크린에 데뷔한다. 중산층 가정을 무너뜨리는 가정부 역할로 일약 스타가 됐고, 드라마 〈장희빈〉(1971~1972)에서 장희빈 역을 맡으며 인기를 굳혔다. 그러다 1974년, 전성기 한가운데서 가수 조영남과 결혼한다. 조영남이 미국 전도 집회 공연에 초청받으면서 윤여정은 플로리다로 건너가 가정주부이자 두 아들의 엄마가 됐다. 9년 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남편의 반복된 외도로 결국 1987년 이혼한다. 양육비도 받지 못한 채 두 아들을 혼자 키워야 했다. 연기를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당시 방송국에선 이혼한 여성을 기용하지 않았다. “그땐 이혼이 주홍 글씨 같았어요.”
막막한 상황에서 미국으로 다시 떠날지 고민했지만, 드라마 작가인 친구 김수현이 붙잡았다. “당신은 죄인이 아니야. 왜 도망가려고 해? 여긴 당신 나라야. 여기서 버텨.” 그 뒤로 작은 역할도 가리지 않고 맡으며 커리어를 다시 쌓았다. 오스카 수상 소감에서도 털어놓았듯, 당시 연기는 순전히 생계를 위한 일이었다. “저한테는 그냥 직업이었어요. 스타라고 여긴 적도 없고, 화려하다고 느끼지도 않았어요. 그냥 아이들 먹여 살리려고 일하는 엄마였죠. 거의 모든 일을 다 했어요. 계속 일했고요.”
두 아들이 자리를 잡은 65세쯤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작품을 고를 수 있게 됐다. 그중 하나가 2025년 〈결혼 피로연〉 리메이크였다. 큰아들이 2000년에 커밍아웃을 했기에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성난 사람들 2〉는 영어 연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출연을 수락했다. “쇼 러너 이성진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엄청 부자라서 전담 통역사가 있어요. 영어 안 해도 돼요’라고 해서 ‘완벽하군, 할게요’ 했죠.” 윤여정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실제 대본을 받아보니 영어 대사가 꽤 있어서 크게 당황했다.
부유하고 권력 있는 여성 역할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남편이 세 명이라는 설정도 흥미를 끌었다. “결국 두 명으로 줄었지만, 재밌겠다 싶었죠.” 작품 밖에서도 윤여정의 존재감은 확실했다. 송강호가 출연을 거절하자, 직접 전화를 걸어 설득한 것이다. “제가 거의 빌었어요. ‘송강호 씨, 당신은 한국 최고의 배우니까 어떤 역할이든 할 수 있어요. 제발 해주세요.’” 결국 송강호는 출연을 수락했고, 윤여정은 그에게 밥과 와인을 샀다.
할리우드 활동에 대해서는 담담하다.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되더군요. 지금 이 상황도 계획하진 않았죠. 그걸 배웠어요.” 영어 실력 때문에 앞으로 할리우드 작품이 많지 않을 거라고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터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 진행됐다.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둘째 아들 조늘이 거든다. “한국 사람들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자꾸 영어가 부족하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완벽주의와 끊임없는 노력, 약간의 운이 지금의 윤여정을 만들었다. 아내로, 엄마로, 이민자로, 무명 배우로 수많은 고비를 넘긴 뒤, 70대에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젊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윤여정은 특유의 시니컬한 매력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언 같은 거 안 해요. 시간 낭비예요. 인생은 각자 사는 거죠. 경험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저 결혼할 때 다들 말렸잖아요. 조언 엄청나게 들었죠. 결과 보세요. 그래서 조언 안 해요. 내가 교황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