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군체’로 모인 우리! 전지현, 구교환, 지창욱, 김신록, 신현빈, 고수
인생의 향방을 가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우린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 <군체>의 배우들은 작품 안팎에서 매 순간 결정을 마주한다. 그 결과를 감내하고 성장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섰다.
전지현, 리더의 조건
전지현은 공기 흐름을 바꾸는 배우다. 작품 안팎 어디서든 마주할 때마다 그랬다. <보그> 촬영이 끝나자 세수를 하고 맨얼굴로 스튜디오를 떠나는 순간까지 그녀에게만 불을 비춘 듯 시선을 잡아끌었다. 영화 <군체>의 첫 등장 신도 그랬다. 정의로운 생명공학자 권세정으로서 질끈 묶은 머리에 청바지의 간소한 차림이었는데도 영화의 서사가 누구를 중심으로 흘러갈지 단숨에 각인시킨다. 전지현은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 이후 11년 만에 영화 복귀작으로 연상호 감독의 <군체>를 선택했다. 그 사이 굵직한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영화가 11년 만이라니 조금 놀랐다. 그만큼 우리에게 동시대 톱 배우로 늘 자리해왔기 때문이다. 전지현은 <군체>가 “연상호 감독님이 계속 이어온 세계관 안에서 인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한 장르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라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그 안에서 제가 맡은 인물이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감독님 팬이기도 해요.”
<군체>는 정체불명의 감염 사태로 봉쇄된 건물 안, 고립된 생존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진화하는 감염자들에 맞서 사투를 벌인다. 생존자 그룹의 리더인 세정은 감염자들의 진화 패턴을 읽고 어떻게든 사람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애쓴다.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통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비추는 이야기 같아요. 감염자들이 연결되어 진화한다는 설정이 아주 크게 다가왔고요. 동시에 조금 섬뜩하기도 했죠. 매우 효율적인데, 그 안에 ‘개인’이 없다는 느낌이 강해서요.”
생존자들은 건물에 고립되기에 거의 하나의 ‘룩’으로 영화 전체에 나온다. 그렇기에 그 룩은 캐릭터의 특성을 집약해 보여주어야 한다. 전지현은 청바지에 회색 재킷, 이너는 집업 후디와 흰색 티셔츠를 입었고, 묵직한 검은색 백팩을 멘다. 이 스타일링에선 인물이나 영화의 어떤 점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세정은 어떤 상황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인물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스타일도 과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져가려고 했죠. 청바지나 재킷, 후디, 백팩 같은 아이템이 실제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어요. 덧붙여 목소리도 감정을 크게 쓰기보다는 필요한 순간에만 힘이 실리게끔 조절하려고 했죠.”
세정이란 인물은 그중 상황에 좌절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제안하고 단호히 실행한다. 그렇기에 극단적 상황에 직접 맞서는 경우가 많고, 자연스럽게 액션이 뒤따른다. 전작 <도둑들>(2012), <베를린>(2013), <암살>에서도 액션을 선보여왔지만, <군체>에서는 감염자들의 동물에 가까운 액션에 대응하는 만큼 전작과는 다른 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같은 슬라이딩을 해도 전지현의 긴 팔다리 덕분에 확연히 시원해 보이는 점은 여전하다. “액션은 늘 몸의 한계를 시험하는 작업인데, 그만큼 바로 느껴지는 에너지가 있는 장르예요. 이번에는 감염자들의 움직임이 훨씬 본능적이고 예측이 안 돼 더 빠르게 반응해야 했고 집중도 더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 긴장감이 컸어요. 그러면서 가장 재미있는 촬영이었어요. 현대무용을 하는 분들이라 그런지 단순히 무서운 게 아니라 유기적인 흐름처럼 느껴졌거든요. 그 에너지가 현장에서 대단히 강했어요.” <군체>는 모션아키텍트와 코스모스인아트 소속 안무가들이 모여 프로덕션 초기 단계부터 감염자들의 역동적이면서 기이한 움직임을 설계했다.
어느 작품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만 <군체>는 배우들의 앙상블이 특히 중요하다. 구교환, 지창욱, 신현빈, 김신록, 고수 등과 고립된 공간에서 위기 상황에 처하면서 에너지를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누구 한 명이 혼자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흐름 안에서 만들어지는 장면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도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는 전체 리듬을 맞추는 데 더 신경 썼어요.”
연기 측면만 봐도 지금 가장 뜨거운 배우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각 인물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변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감정이 격해지는 장면에서 배우분들의 에너지가 그대로 전달됐고, 그 힘이 장면을 더 살아나게 한다고 느꼈죠.”
배우는 경력이 쌓일수록 자유롭게 연기를 주고받기에 앞서 영화 현장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듯하다. “공감해요. 단순히 연차 때문이라고 하기보다 살면서 느끼는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게 자연스럽게 현장에도 반영되는 것 같아요.” 권세정과 전지현의 공통점이다. 세정은 생존자 무리를 이끄는 리더로서 활약한다. 극단적 상황에서 성향이 변치 않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전지현은 이 부분을 중요하게 언급했다. “상황이 계속 바뀌어도 자기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크게 와닿았어요. 그게 이 인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요.”
본능과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변할 수밖에 없는 다른 등장인물 또한 공감되기에, 세정이 끝까지 정의로울 수 있는 이유를 관객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영화 초반에 세정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탓에 교수 재임용에 탈락했다는, 성격에 대한 정보를 주지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선 더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극단적인 상황일수록 사람의 본질이 더 드러나죠. 세정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기준을 끝까지 놓지 않는 인물인데, 그것을 특별하게 보이도록 하기보다는 그냥 당연한 선택처럼 보이게끔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담담하게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연상호 감독이 세정에 관해 강조한 점도 특별한 인물로 만들기보다는 관객이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는 인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전지현은 연기하면서 “감정을 크게 보여주기보다 선택을 따라가게 하는 데 더 집중했다”고 회상했다. “큰 변화를 주기보다는 작은 선택으로 인물을 만들어가려고 했어요. 말이 없는 순간 또는 시선 같은 데서 조금씩 드러나게 하고 싶었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생명공학부 교수이자 특별조사팀 소속 공설희(신현빈)와 연대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남성으로 연결된 인연이지만, 이를 넘어서 서로 협력해 극의 키를 찾고 풀어가는 관계다. “두 인물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보는데, 결국 같은 방향으로 간다는 점이 좋았어요. 단순한 관계성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느낌이라 더욱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
전지현에게 가치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꾸준함’과 관련한 답이 돌아오곤 한다. 배우 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 연마하는 것 또한 “결국은 꾸준함”이라고 답한다. “특별한 것보다 매일 기본적인 걸 지켜가는 힘. 그게 쌓여야 오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배우로서 꿈꾸는 풍경도 다르지 않다. “거창한 순간보다 그냥 평범한 하루하루가 잘 이어지는 삶이면 좋겠어요. 특별하지 않아도 ‘오늘 잘 살았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쌓이는 것. 그리고 그 삶의 풍경이 대체로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였으면 좋겠어요.” 김나랑 <보그> 피처 디렉터
구교환, 기분 좋게 계속 증명하며
〈군체〉의 ‘서영철’은 문제적 인물이다. 정체불명의 감염 사태를 일으킨 천재 생물학자. 악당이되 매혹하는 구석이 있고, 강력하되 위태로워 보인다. 구교환이 이 인물을 연기하는 방식은 의외로 단순했다. “연기는 최대한 심플하게 했어요. 이미 레이어가 많은 인물이잖아요. 웬만하면 서사를 숨기자는 입장이었고요. 굳이 캐릭터의 사연을 드러내 전시할 필요가 없겠더군요.”
그간 그의 작품을 돌이켜보면 어떤 문제적 인물을 연기하더라도 인물을 판단하지 않으려는 배우의 중립적 시선이 엿보인다. 서영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빌런을 연기할 때는 꼭 지키려 하는 게 있어요. 정서적으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관객에게 강력하다는 느낌을 한번은 줘야 한다는 거예요. 전투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완전 미친놈이구나’ 싶은 포인트 하나는 보여주고 싶거든요. 서영철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구나, 자기 신념이 확실한 사람이구나를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그것도 충분히 무섭잖아요.”
빌런의 존재감을 완성하는 건 ‘스타일’이다. 특히 서영철처럼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면 더더욱. “왠지 서영철의 옷장을 열면 다 이런 스타일의 옷뿐이거나 이 옷만 열 벌쯤 걸려 있을 것 같다고 느꼈어요. 일종의 유니폼이죠. 그리고 서영철은 꽤 쇼맨십이 있는 사람 같더라고요. 그 머리, 아침에 몇 시간 만졌겠어요. 넥타이까지 매고 온 걸 보면, 사건 발생 당일이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라는 게 관객에게 전달됐으면 했어요.”
구교환은 <군체>의 완성본을 봤을 때 “좋아하는 코믹스가 실사화된 느낌”이었다고 표현한다. “콘티에서 본 그림이 거의 그대로 구현된 느낌이었어요. 이건 연출을 향한 존경의 표현이에요. 연상호 감독님과의 관계를 파트너십이나 신뢰 같은 단어로 말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현장에서 연기할 때마다 감독님이 알아서 잘해주겠지 하는 마음이 컸어요. 감독님도 비슷하게 얘기하시더라고요. 배우가 잘하겠지. 서로 잘해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어요.(웃음)”
그 믿음은 단순한 낙관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현장에서는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구교환은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컷 사인이 나오기 전까지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자신을 유연하게 열어둔다.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배우가 순간 다른 호흡을 발견할 수 있고, 촬영감독의 무빙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감독이 그날 아침 이불을 개다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요. 안다고 말하는 게 더 무서워요.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어요.”
서영철은 예상을 비트는 감정 표현으로 일순간 장면의 공기를 서늘하게 만들곤 한다. 구교환은 워낙 동물적인 감각으로 자유롭게 연기하는 배우이기에 이 순간 역시 현장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나리오에 인물이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인물로서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나 표현이 나와요. 서영철은 대사가 많지 않아요. 하지만 지문에 캐릭터의 감정은 정확하게 적혀 있었어요. 물론 연기하다 보면 그 타이밍이나 세부 표현은 달라지지만요. 전 때로는 관객이 서영철의 진심이 무엇인지 혼란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서영철에 맞서는 인물은 생명공학자이자 빌딩에 고립된 생존자들의 리더 권세정(전지현)이다. 전지현과 구교환이 한 프레임에 잡힐 때면 둘의 낯선 조합에서 오는 흥미로운 에너지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실제로도 정말 재밌게 찍었어요. 저는 현장을 즐긴다기보다는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편인데, 선배님도 그러시더군요. 사실 전지현 선배님의 오랜 팬이에요. 연기 스펙트럼이 엄청 넓으시잖아요.”
요즘처럼 구교환의 이름이 많이 불리는 때가 없다. 스스로는 이 시기를 어떻게 감각하고 있을까.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게는 기회겠군요. 그만큼 저를 사용하고 싶은 분들이 더 늘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더 많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을 테니까 잘해내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이 일은 공정한 것 같아요. 아무리 어제의 내 연기가 좋았다고 한들, 박수를 받았다 한들 그 호평이 오늘의 내 연기까지 보장해주지는 않잖아요. 기분 좋게 계속 증명해야 돼요.”
대중의 시선이나 평가에 대해서도 그는 나름의 소신을 갖고 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또 모두를 맞추려다 보면 저만의 무기가 사라질 것 같고요. 제 작품을 보고 모두가 좋아하진 않더라도 누군가 한 명은 꽂혔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말미에 그는 최근 연출한 미쟝센단편영화제 트레일러를 편집 중이라고 했다. “연출할 때만큼은 나의 취향을 온전히 집어넣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명랑한 즐거움이 가득했다. 김현민 영화감독, 저널리스트
지창욱, 나를 둘러싼 세계에 기대며
좀비물이라는 외피를 두른 <군체>에서 지창욱이 연기한 보안 요원 ‘최현석’은 가장 현실적인 인간의 얼굴에 가깝다. 관객으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그가 이 역할에 끌린 이유도 그 지점에 있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나 연기를 할 때나 현석이라는 인물에 많이 공감했어요. 유독 현실에 발붙인 느낌이었거든요. 누나 ‘최현희(김신록)’가 대의를 먼저 감안한다면, 현석은 자기 가족이나 내 주변 사람부터 챙겨요. 인물의 동기가 지극히 인간적이잖아요.”
〈군체〉에서 현석의 서사는 현희와 분리될 수 없다. 현석은 장애를 가진 누나를 캠핑용 지게로 업은 채 좀비들로 초토화된 빌딩을 누빈다. “줄곧 누나를 등에 업고 다녔지만, 오히려 내가 업혀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는 촬영 내내 김신록 배우에게 호흡을 맡겼다. “신록 누나가 몰두하는 감정의 깊이가 워낙 깊다 보니 그 흐름을 믿고 따르고 싶었어요. 등 뒤에 있는 사람이 너무 든든했죠.”
두 사람은 촬영 내내 한 몸처럼 움직였다. 지게에 와이어를 달거나 바퀴를 달지 않은 채 실제 무게를 감당하며 촬영을 진행했고, 그만큼 동작은 더 생생하고 감정은 더 선명하게 살아났다. 지창욱은 자신과는 사뭇 다른 상대 배우의 준비 방식에도 자극을 받았다. “신록 누나는 철저히 준비해서 자기 중심을 가지고 현장에 오고, 저는 현장에서 더 많이 찾는 스타일이에요. 원래도 좋아하는 배우였지만 곁에서 그 집요함을 보면서 존경하게 됐어요. 저는 자기 일에 집요함을 가진 사람에게 존경심을 느끼거든요.”
〈군체〉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는 지창욱의 롱 테이크 액션 장면이다. 원래 핸드헬드로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현장에서 그의 움직임이 유려하게 이어지자 즉석에서 원 테이크로 변경됐다. “장면을 잘 완수해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바닥이 온갖 점액질 때문에 미끄러운 상태였거든요. 즉석에서 원 테이크로 바뀌었기 때문에 합도 완전히 외우지 못해서 애드리브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동작을 액션 팀이 잘 받아주셔서 매끈하게 찍혔어요. 액션 팀의 노련함과 프로페셔널함에 새삼 감탄했어요.”
그는 자신의 연기 방식을 “연출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너무 오래 고민하면 기존 방식대로 연기가 나올 수밖에 없고, 결국 내 취향 안에 머물게 되거든요. 그래서 나와 다른 새로운 시야를 가진 연출자나 팀을 만나면 나를 조금은 다른 곳으로 데려가줄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되도록 나를 내려놓으려고 해요. 내가 맞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요. <군체>도 그런 경험이었어요.”
그는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말한다. 재능 넘치는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보통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상실과 불안을 느꼈고, 그러한 경험은 그에게 성실함이라는 태도의 기틀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노력만이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신인 시절을 떠올리며 “미련할 정도로 노력했다”고 표현하는 그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서는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자평한다. “포기하지 않았잖아요. 매 작품 할 때마다 아쉬움이 남고 내 욕심대로 잘 안되는 것들이 태반이에요. 거기서 힘이 빠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덤비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꾸준히 해본 적이 없는데 연기만큼은 그렇지 않아서 스스로도 신기해요.” 단순히 직업이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경지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이 여전히 식지 않았다. “관객에게 쾌감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커요. 연기를 하면서 내가 느끼는 쾌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전 그것보다는 관객이 우선이에요. 내 연기를 보고 즐거웠으면 좋겠고, 다만 한 장면에서라도 놀라움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분명한 방도는 없겠지만 그런 목표를 마음에 담고 연기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클 것 같아요.” 배우라면 누구나 숙명처럼 고심할 ‘낯선 얼굴’에 대해서는 기대는 바가 있다. “함께하는 팀이 바뀌고 분장이 바뀌고 대사가 바뀔 뿐 결국 나는 나 아닌가 하는 의문이 늘 있어요. 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희망은 ‘세월’이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얼굴과 목소리도 조금씩 바뀌고 분위기도 제법 달라지잖아요. 그 시간의 힘을 믿고 가려고요.” 김현민 영화감독, 저널리스트
김신록, 비워야 보이는 것들
김신록은 요즘 ‘냉장고 파먹기’에 꽂혀 있다. 이사나 긴 여행을 앞둔 건 아니다. 냉장고를 비워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쾌감이 목적이다. “냉장고를 열어놓고 어떻게 조합해서 먹으면 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거죠. 그렇게 딱 맞춰 해치웠다는 데 쾌감의 본질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비우고 싶을 만큼 많은 것이 그녀를 채웠기 때문일까. 지금 김신록은 누구보다 일을 많이 하는 배우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로드>와 MBC 드라마 <오십프로>가 올해 공개를 앞두고 있고,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무대에도 올랐다. 그러니 다른 한쪽에서 뭔가를 비우지 않고는 지탱하기 어려운 생활일 수도 있다.
<군체>는 <지옥>(2021)에 이어 연상호 감독과 만난 두 번째 세계관의 작품이다. <군체>의 시나리오를 읽은 김신록은 “현대사회에 필요한 가장 절묘한 질문을 매우 쉬운 방식으로 던지는” 연상호 감독의 장점이 빛나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녀가 맡은 최현희와 지창욱이 연기한 최현석은 친남매로 재난을 맞이한 평범한 시민의 입장을 보여준다. 특히 최현희에게 두 다리가 불편한 장애가 있다는 설정이 중요하다. “감독님은 현희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선의를 가진 인물이라고 했어요. 저의 역할에 도움이 되는 설명이었지만, 자칫 ‘착한 장애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으로 오해될 소지도 있었죠. 그래서 어떻게 이 인물의 생존 본능과 이기심, 취약한 부분 등을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많은 장면에서 김신록은 지창욱의 등에 업혀 있어야 했다. 지창욱뿐 아니라 “평소 몸을 많이 쓰면서 연기하는 편”이라는 그녀에게도 도전이었다. “흔히 탱고를 두고 ‘하나의 심장과 네 개의 다리가 추는 춤’이라고 말하잖아요. 현희와 현석도 그처럼 ‘두 개의 머리, 네 개의 팔, 두 개의 다리’로 움직이는 거죠. 나중에는 감염자들이 현희를 업고 있는 현석의 형태를 그대로 흉내 내기도 해요. 감염자들이 볼 때는 그게 더 진화된 형태처럼 보이는 거예요. 지창욱 배우가 나를 업느라고 고생이 많았지만, 덕분에 감독님의 기발함이 빛나는 장면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누나를 업은 남동생의 모습에서 기존 재난 영화가 보여준 가족애의 서사가 떠오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군체>는 이 남매의 이야기를 ‘가족’에 묶어두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남매가 마주하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아직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앞서 김신록이 이야기한 “현대사회에 대한 가장 절묘한 질문”과 만나는 장면이다. “<군체>에서 집단감염을 일으킨 주체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생각을 공유하면 갈등이 없을 거라고 하잖아요. 그 장면은 실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봤어요.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만 한다면, 개별성과 고유성 이런 감각이 없어지는 거죠.” 관객의 기대뿐 아니라 연상호 감독이 이전 작품에서 드러낸 정서까지 배반하는 온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2026년은 <군체>를 비롯해 2025년 한 해 동안 열심히 채운 결과물이 공개되는 해다. 하지만 올해도 쉬어 가는 시간은 거의 없다. 카메라 앞과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틈틈이 영화와 공연을 보고 책을 읽고 에세이도 쓸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김신록은 스스로를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냉장고 비우기를 비롯한 이 활동에 대해 그녀는 ‘나의 넝마와 마주하기’란 이름을 붙였다. 냉장고뿐만 아니라 옷장과 신발장, 책장을 비워보면서 자신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볼 계획이다. “최근 본가에 갔어요. 어머니가 가져가라고 한 옛날 물건이 있는데, 어린 시절 일기가 있더라고요. ‘오늘부터 새로 시작’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30대 때 어딘가에 쓴 자기소개에도 ‘내일부터 잘 살아야지’라고 쓴 게 있었거든요. 그러고 보면 사람이 하나도 안 바뀌는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우선 현재를 돌아보고 싶었어요. 이건 정말 삶에 대한 큰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일 수 있어요.” 모든 걸 비워가는 과정에서 김신록은 분명 자신이 이미 오늘을 꽤 잘 살고 있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신현빈, 늘 조금은 낯선 자리에서
연상호 감독과는 이번이 네 번째 작품이다. 〈괴이〉 〈계시록〉 〈얼굴〉을 거쳐 〈군체〉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엔 어떤 암묵적인 신뢰가 쌓였다. 그래서일까. 신현빈은 그동안 자신의 캐스팅 이유를 감독에게 굳이 묻지 않았다. “좋게 생각하면 믿어주시는 것 같고, 나쁘게 생각하면 자꾸 어려운 걸 주시는 것 같아요.(웃음) 〈계시록〉도 녹록지 않았는데, 〈얼굴〉에서는 얼굴을 내보이지 말라고 하시더니, 이번엔 또 많은 것을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을 주셨어요. <군체>에서는 도대체 어디까지 표현해야 되나, 늘 그게 딜레마였던 것 같아요.” 웃음기가 섞인 말이지만 배우의 진지한 고민이 여실히 묻어난다.
〈군체〉에서 그가 맡은 ‘공설희’는 좀비로 아수라장이 된 빌딩과 대책 본부 안팎을 잇는 인물이다. 빌딩 안 생존자들의 절박함과 바깥의 관료적 냉정함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사람. 감정을 얼마나 드러내고 어디까지 눌러야 하는지가 매 컷의 이슈였다.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국 공설희는 감정을 좀 더 누르고 강인하게 비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야 관객이 이 인물을 믿을 수 있을 테니까요.”
신현빈의 연기에는 일관된 태도가 있다. 본인 캐릭터의 완성도만 좇지 않고 영화 전체의 균형을 함께 고민하는 것. 빌딩 안팎의 온도 차, 장면 간 밀도의 균형, 관객이 어느 입장에 설 수 있을지. 그 모든 것을 배우의 자리에서 계산한다. “때로는 배우 입장에서 내 캐릭터의 이런 면이 더 설득돼야 하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질문도 하죠. 그게 정말 이 영화에 필요할까, 이 영화에서 누가 그걸 궁금해할까. 내가 여기서 해야만 하는 게 무엇인가를 가장 많이 고려하는 편인 것 같아요.”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으면 하나의 큰 맥락이 짚어진다. 익숙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얼굴〉 이후 주변에서 ‘과감하다’ ‘용기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작품이나 캐릭터를 선택하는 데 과감한 면은 늘 있었던 것 같아요. 늘 새로운 걸 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다른 면이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 편이에요.” 그런 선택이 모여 지금의 신현빈을 만들었다. 활동 기간이 짧지 않은데도 고정된 이미지로 읽히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게 보인다면 배우로서 너무 감사하죠. 저는 인물의 분량이나 비중을 작품 선택의 첫 번째 기준으로 삼은 적이 없어요. 아마 그래서 그런 인상이 생긴 것 같기도 해요.”
이번에 그가 연기한 공설희는 좀비와 사투를 벌이는 현장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그들을 조력하는 인물이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권세정(전지현)은 물론 공설희, 최현희(김신록)까지 여성 인물들이 중요한 서사를 이룬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이들은 각자 옳다고 믿는 것, 정의라고 여기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관철하려는 사람들이고, 표현 방식도 서로 달랐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그게 희생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이끄는 일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뒤에서 그들을 서포트하는 방식이었죠. 그런 점이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공설희라는 캐릭터는 연기하기 어려웠지만, 좋은 어른의 요소를 두루 갖춘 사람이라 좋았어요.”
늘 그래왔듯 그는 외양부터 목소리까지 인물의 결을 세심하게 만들어갔다. “교수라는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모습을 찾으려 했어요.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은 아닐 것 같지만, 그렇다고 딱딱하거나 보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면 했고요. 대책 본부에 들어가는 시점부터는 이미 어딘가에서 울었던 것 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어요. 일부러 낮잠을 더 자고, 조금 더 먹어서 얼굴이 붓고 푸석한 상태로 현장에 갔어요. 목소리도 깨끗한 상태가 아니라 지쳐 있고 조금은 긁힌 듯한 톤인데, 그 상태에서 당당하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람. 그런 느낌을 찾으려 했던 것 같아요.”
숲을 아우르려는 성향을 가진 그답게 현장에서는 최대한 편안하게 존재하려 한다. 노하우가 있다면 대본을 내려놓는 것이다. 대신 그 시간에 스태프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의 긴장을 풀곤 한다. “현장에서 배우가 대본을 보고 있으면 말 걸기가 힘들잖아요. 내가 편안해야 주변도 편안해지고, 그게 결국 제 연기에도 도움이 되니까요.”
배우로서 요즘 이슈를 묻자 꽤 빠르고 명쾌한 답이 돌아온다. “크고 긴 고민은 잘 안 하려고 해요. 고민한다고 달라지지 않잖아요. 대신 주어진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마음을 잃지 않고 싶어요.” 그만큼 이 일이 좋고 오래 지속하고 싶어서다. “일을 계속하려면 행복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제 인생에서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는 시간이 결과물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는 시간보다 훨씬 길잖아요. 그 과정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는 걸 어느 순간 알았어요.” 김현민 영화감독, 저널리스트
고수, 의심할 수 없는 남자
<군체>에서 고수의 이름은 ‘그리고 고수’로 표기되어 있다. 특별 출연이다. 그에게 ‘특별 출연’이 특별한 건 아니다. 영화 <덕혜옹주>(2016)에서는 이우 왕자를 연기했고 드라마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2019)에서는 1화에 세자로 등장해 극의 긴장을 높였다. 하지만 그때 고수에게는 ‘그리고’가 없었다. 영화 크레딧에서 ‘그리고’는 접속부사라는 본래 기능으로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앞에 열거된 배우들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그들과 구별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강조한다고 할까. 고수가 <군체>의 특별 출연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도 같았다. “작품을 볼 때 그 역할에 분명한 뭔가가 있다면 비중과 상관없이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에요. <군체>에서 제안받은 인물도 매우 중요한 변곡점에 있는 그런 인물로 봤어요. 그리고 연상호 감독님 작품은 늘 좋아했기 때문에 선택한 거죠.”
고수가 연기한 한규성은 전남편이자 현 남편이다. 10년 전 이혼한 전처 세정(전지현)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는 현재 아내인 설희(신현빈)와 미국 이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아내 또한 세정의 처지를 함께 걱정해준다. 이런 관계가 가능할까 싶지만, 고수의 존재감은 그런 의문을 옅게 만든다. 그동안 고수가 보여준 신뢰감의 이미지 덕분이다. 분명 깊은 유감을 남긴 이혼은 아닐 것이고 그와의 사랑을 주저하게 만들 만큼 지저분한 사연도 아닐 것이란 느낌이 든다고 할까? 물론 신뢰할 수 있는 남자라면 이혼 자체를 안 했을 것이란 분석도 가능하다. “한규성은 무던하게 평범하게 섞여서 살고 싶어 하는 그런 인물이에요. 그런데 세정이란 여자가 물불을 안 가려도 너무 안 가리는 사람이라서 힘들었던 거죠.” 영화 속에서 한규성은 “왜 나랑 이혼했냐”는 전처의 질문에 “내가 비겁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집단감염 사태에서 비겁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듯 다른 생존자를 위해 뛰어다닌다. (아직은 상세하게 밝힐 수 없는) 한규성의 이야기는 관객이 <군체>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수는 한규성이 “관객의 입장에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 인물이길 바랐다”고 말했다. 가장 현실에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에 관객은 그에게서 오히려 가장 의미심장한 인상을 갖게 될 것이다.
<군체>를 촬영한 2025년은 그가 이전보다 더 다양한 활동을 실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직장인들>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가 하면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는 미남 배우 행세를 하는 김민수의 친한 형으로 등장했다.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놓고 뻔뻔함을 무기로 밀어붙이는 형식의 코미디라는 점에서 고수의 출연은 큰 이슈가 되었다. 대중에게 고수는 그런 뻔뻔함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여긴 배우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고수는 “세상이 너무 바쁘게 변했다”고 말한다. “과거와는 정말 다르다는 걸 매번 실감하고 있어요. 이런 때에 저의 변화를 담아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죠. 지금의 어린 친구들은 저의 20대, 30대 모습을 모르잖아요. 그래서 저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도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소통하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요.”
그는 그처럼 현재의 자신이 어느 때보다 ‘넓어졌다’고 말했다. 역할 비중, 캐릭터 성격, 매체 특징을 일일이 따지기보다는 ‘흥미로운 무언가’에 우선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찾으면 일단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선후배들을 만나는 것도 어려워지거든요. 저는 요즘 현장이 점점 더 재미있어요. 과거에 선배들이 저에게 알려주고 맞춰주신 것들을 이제는 제가 보여주고 싶어요.” 더 넓고 다양한 활동을 위해 고수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일찍 잠든다. 틈나는 대로 산에 오르고 자전거를 탄다.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일찍 잠드는 게 더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고수는 간단히 답했다. “일찍 일어나면 일찍 자게 되어 있어요.” 역시 의심할 수 없는 고수였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