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비통 2024 크루즈 컬렉션에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창조한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쇼을 위한 장소를 선택하는 데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만큼 탁월한 안목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제스키에르는 20세기에 지어진 놀라운 건축물에서 일종의 그랜드 투어 쇼를 펼쳐왔다. 건축가 존 로트너(John Lautner)의 팜스프링스 건물에서 2016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였고,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가 설계한 리우데자네이루의 니테로이 현대미술관에서는 구불구불한 빨간색 경사로를 따라 2017 크루즈 컬렉션 룩을 입은 모델들이 차례로 내려왔다. 루이스 칸(Louis Kahn)의 걸작 중 하나인 샌디에이고의 소크 연구소에서 열린 2023 크루즈 쇼는 장엄하기까지 했다. 2023 프리폴 컬렉션의 무대였던 잠수교는 또 어떤가. 강바람을 맞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잠수교를 따라 비장하게 걸어오던 모델들은 전사와도 같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2024 크루즈 쇼를 위해 제스키에르가 고른 장소는 바로 이탈리아 마조레 호수(Lake Maggiore)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 이솔라벨라(Isola Bella). 500년 동안 이탈리아의 귀족인 보로메오 가문이 소유해온 섬에 자리한 저택의 계단식 정원을 런웨이 삼아 펼치는 쇼라니, 상상만으로도 신화적이었다. 제스키에르는 “이탈리아에는 아름다운 장소가 많지만 호수는 특별히 더 신비롭거든요”라고 말했는데, 그처럼 이곳에는 화려하면서도 고즈넉하고, 우아하지만 은밀한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쇼 당일, 이솔라벨라섬 자체가 일종의 루이 비통 타운으로 변모했다. 루이 비통의 상징적인 가방과 트렁크, 트래블 북이 전시된 가판대가 길가에 줄지어 서 있었다. 게스트들은 보트를 타고 이솔라벨라섬에 내려 샴페인을 마시며 루이 비통 타운을 산책하다가 해가 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쇼를 관람하고 호숫가에서 열리는 애프터 파티를 즐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하루 종일 폭우였다. 리허설 때 잠깐 하늘이 맑아지나 싶더니, 곧 다시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아무리 루이 비통이라도 날씨를 바꿀 순 없었다. 결국 쇼는 보로메오 궁전의 정원이 아닌 보로메오 궁전 안으로 급히 장소를 옮겨야만 했다.
알프스산의 그늘이 드리워진 정원을 거니는 모델은 분명히 근사했을 테지만, 보로메오 궁전 실내도 충분히 웅장했고 더욱 경쾌했다.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명화와 프레스코화, 무라노 유리 소재 샹들리에로 장식된 바로크 양식의 방은 시간 여행을 온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나폴레옹과 조세핀,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머문 것으로 유명한 방과 방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델들은 호수에서 막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스키에르가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을 쇼의 장소로 선택한 것도 물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호수에 사는 인어, 물에서 나온 소녀들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어요. 그 영감을 점차 진화시켰죠.”
제스키에르는 그동안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을 패션으로 풀어내왔다. SF적인 실루엣과 기술을 접목한 패브릭, 메탈릭한 마감, 미래적인 해석은 그의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제스키에르는 특히 파리가 아닌 곳에서 쇼를 열 때마다 좀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투영해왔지만, 2024 크루즈 컬렉션은 우리의 상상을 더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번 공상 과학적 판타지에는 동화 같은 몽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다른 행성에서 온 것 같으면서도, 여신이나 인어를 떠올리게 만들고, 수백 년 전 보로메오 궁전을 방문한 누군가의 모습이 슬쩍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컬렉션은 스쿠버다이빙 수트를 연상시키는 룩으로 시작했다. 큼지막한 옷깃은 지느러미 혹은 물갈퀴처럼 보였다. 컬렉션 곳곳에는 일본 아티스트 호쿠사이(Hokusai)가 그린 파도와 그 아래서 살 것만 같은 생명체의 비늘이 정교하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때로는 다이빙 수트 위로 맺힌 물방울처럼 실사에 가까운 물방울무늬가 몽글몽글 더해지기도 했고 조개껍데기를 닮은 미니스커트도 등장했다. 스타일링에서도 위트가 빛났다. 네오프렌 수영복과 궁중 예복 같은 우아한 가운을 조합한 룩이 있는가 하면 인어 실루엣의 시퀸 스커트에 N-1 재킷을 매치하는 식이었다. 무엇보다 극적일 정도로 초대형 모자가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이 바로크 양식의 헤드피스는 오페라와 영화 소품을 제작하는 로마의 아틀리에에서 만든 것이다. 프랑스 브랜드 루이 비통이 이탈리아에서 연 첫 쇼이니만큼 제스키에르는 이탈리아의 전통 공예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장인의 노하우가 쇼에 녹아들기를 원했습니다.” 신임 CEO 피에트로 베카리(Pietro Beccari)가 이탈리아인임을 고려하면 시기적절한 선택이다.
2024 크루즈 쇼 3주 전, 제스키에르와 루이 비통 팀은 서울을 방문했다. 스트리트 패션에 무게를 둔 스포티하고 화려했던 2023 프리폴 컬렉션은 현대 도시에 맞춰 제작한 듯 서울 분위기와 꼭 맞았다. 그에 비교하면 꿈속을 걷는 듯한 느낌의 호숫가 크루즈 쇼에서도 ‘일상복’이라고 할 수 있는 옷이 있었다. 바로 제스키에르가 이탈리아 컬러라고 묘사하는 연한 파스텔 컬러의 캐시미어 스웨터와 섬세한 자수의 레이스 셔츠, 호화로운 브로케이드 원단으로 만든 바지, 그리고 수상식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꽃무늬 드레스와 그 위에 툭 걸친 클래식한 롱 코트다. 쇼의 중·후반부, 모델들이 상대적으로 웨어러블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인어들이 다리를 얻어 땅을 밟은 것처럼.
“인어는 끝내 꽃이 되지만, 그 꽃은 실존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제스키에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표현대로 쇼의 피날레 즈음엔 발목까지 오는 파스텔 톤 드레스가 여러 벌 등장했는데, 런웨이에 드레스를 선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그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실크와 오간자, 레이스 소재가 부드럽게 몸을 감싸고, 소매는 꽃처럼 풍성했으며, 물결처럼 힘차거나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밑단의 드레스는 섬세하면서도 대담했다.
제스키에르가 창조한 세계에는 호수의 전설이 존재했다. 용과 유니콘이 등장하며, 밤사이 인어가 조심스럽게 우리를 찾는 오래된 이야기가 컬렉션 속에 숨어 있었다. 물방울 구슬이 맺힌 (꾸뛰르라 해도 좋을) 망토나 상상의 동물이 수놓인 퀼팅 재킷 대신 누가 조용한 럭셔리를 원할까? 쇼를 보는 동안 우리 모두는 잠시 다른 세계를 방문한 듯했다. 상상의 힘이 이토록 강렬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V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