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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서는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을까
2024.01.31by 김은희
히라야마가 느끼는 무의미적 행복은 ‘볕뉘’처럼 내 주변에도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볕뉘’를 느끼기 위해 머물렀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글/ 가성문 (영화감독)
영화감독은 어떻게 하면 관객들의 강렬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항상 고민 한다. 그런 고민을 당연한 것처럼 실천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영화에서 ‘강렬한 기대’가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시나리오가 선택을 받아 영화로 완성되기 까지의 경쟁은 매우 치열하기 때문에, 작가나 감독들은 자신의 작품이 강렬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독 신경 쓴다. 때론 자신이 다루는 소재에서 그런 기대 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창작을 일찌감치 포기하기도 한다. 많은 영화가 주로 누군가의 죽고 사는 일을 다루거나, ‘하이콘셉트’를 추구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나 같은 영화감독에게 ‘청소부의 일상’을 다룬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물론 그의 일상으로부터 스토리가 시작될 수 있겠지만, 왠지 청소부가 화장실에서 마약이 가득한 가방을 줍거나, 살인자의 증거 인멸을 목격하는 것과 같은 위기에 빠져야 할 것만 같다. 다시 말해 강렬한 기대를 불러 일으킬 만한 사건이 없다면, 굳이 청소부의 일상을 다룰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없는 청소부의 일상을 다룬 영화가 최근 개봉한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다. 이 영화는 무의미하지 않다. 차분하면서도 깊다. 특별한 사건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매료한다. 은은하게 지속되는 여운이 오래가는 수작이다.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히라야마는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다. 그의 삶은 마치 학교의 방학 숙제로 제출한 일과표처럼 명료하다. 새벽녘, 동네 주민이 빗자루질을 하는 소리가 그의 모닝콜이다. 아끼는 화분에 물을 주고 적당히 자신을 다듬은 후 집밖으로 나선다. 캔 커피로 목을 축이는 것을 시작으로 도쿄 내 공중화장실을 옮겨가며 청소한다. 항상 같은 신사의 벤치에 앉아점심을 먹은 뒤 필름카메라로 하루 한 장씩 같은 하늘 아래 나뭇잎을 촬영한다. 일을 마치고 단골 목욕탕과 지하상가의 이자카야에 들른다. 이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책을 읽다 잠들며 꿈을 꾼다. 그리고 다시 들리는 빗자루질 소리에 똑같은 하루를 시작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의 청소부로서의 흐트러짐 없는 일과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그의 삶은 시작과 끝이 정해진 게임 속 NPC처럼 보인다. 나날이 더하며 사소한 사건들이 침범해오지만, 그런 일들이 주인공의 일관됨을 전복하지 않는다. 중년 남성인 그에게 젊은 여성이 갑작스럽게 키스를 해도, 돈을 빌린 동료 직원이 무책임하게 일을 그만두어도 그는 자신의 루틴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청소부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갈 뿐이다. 바다를 보러 가자는 조카의 낭만적인 제안에도 ‘다음’을 말할 만큼 충동적인 선택을 절제하는 삶이다. 물론 여동생과 조카가 떠난 자리를 지키며 흐느끼는 그는 분명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내일이 되면 고독을
씹는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
영화의 주인공이라면 응당 이어질 새로운 여정이 유보된 그를 위로하는 건 무엇일까? 일상의 사소한 아름다움을 주워담는 일이다. 소일거리 속에서 피어오르는 행복의 감정은 스며들 듯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런 소소한 지점이 이 작품의 진정한 미덕이라 할 수 있겠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빛을 의미하는 ‘코모레비’를 느끼는 순간들이다. ‘볕뉘’라는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이것은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히라야마가 코모레비를 만나는 여러 순간. 그리고 낯익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순간들이나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며 도시의 풍경을 음미하는 순간들까지. 영화는 스쳐 지나갈 법한 인간적 찰나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 영화가 ‘더 도쿄 토일릿’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 사업은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이미지를 브랜딩 하기 위해 안도 다다오, 쿠마 켄고, 반 시게루 등 저명한 일본 건축가들에게 시부야 일대 공중화장실 리노베이션을 맡긴 사업이다. 그런데 빔 벤더스는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영화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어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려낸다. 감독은 분명 아주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는 화장실을 보며 매번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수고하는 누군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곧 더러워질 화장실을 대단히 꼼꼼히 청소해온 그의 인생관에 대해 깊은 호기심과 경의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 청소부의 인생관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의 화(和) 사상을 떠올리게끔 하기도 한다. 화(和)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조화와 협력을 통해 사회적 균형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으로, 수 백년 가까이 가족 경영으로 유지되는 노포 상점이나 부모와 자식이 대를 이어 정치인이 되는 경우가 일본에서 익숙한 이유다. 조카 니코는 히라야마에게 말한다. “엄마 말이 삼촌은 우리랑 다른 세상에 산대.” 히라야마는 답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알고 보면 이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거든.연결된 것처럼 보여도그렇지 않아. 내가 사는 세상과 니코 엄마 세상은 달라.”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도쿄의 스카이라인 위로 태양이 떠오르 는 광경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희로애락이 오가는 표정으로 운전하던 히라야마는 일출을 맞으며 비로소 미소를 짓는다. 이 장면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라는 국호를 가진 일본 사회 속의 한 청소부의 삶을 은유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거장 빔 벤더스는 이토록 현대적인 화장실을 배경으로 매우 고전적인 일본인의 삶의 한 단면을 결합시킨다. 훌륭한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
물론 누군가는 통제선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히라야마의 삶의 방식이 편협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동의한다. 그럼에도 플립폰, 필름 카메라, 헌책, 카세트테이프 같은 구태에 머물러 자신의 소임을 다할 뿐인 그 삶이 우리에게 정서적 디톡스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마 그건 우리가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세상을 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울리는 업데이트 알람에 신속하게 움찔거린다. 스마트폰의 신기능이나 키오스크 조작법을 설교하며, 뒤처지지 않게 학습하셔야 한다고 당부하는 것이 이 시대의 효도다.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 일을 꿈꿀 때 당연했던 극장용 영화는 이미 저물었다. OTT 플랫폼 드라마가 영화감독들의 주무대가 되었고, 심지어 누군가는 이마저도 변변치 않다며 앞으로 세로형 숏폼 콘텐츠가 대세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시대의 진보는 인간의 학습 능력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빨라졌다. 효율성, 생산성 같은 단어들이 인생의 덕목이 되었다. 점점 느리고 무겁고 낭비적인 것은 참기 어렵다. 다 먹지도 못할 김치와 반찬을 바리바리 싸서 들고 오시는 어머니를 보며 사랑 대신 비효율성을 먼저 생각한다. 우정, 사랑 같은 인간 관계를 대할 때도 나의 노력이 들어간 만큼 응당한 결과를 기대한다. 기다리거나 손해 보아도 괜찮을 여유는 원래 우리에게 없었던 것처럼. ‘최소의 비용, 최대의 효과’를 기대하는 연구개발자처럼 삶을 대한다. 기계가 추구해야 할 효용을 자기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색하게 효용을 따지며 의미를 찾을 때, 도쿄의 어떤 화장실 청소부는 우리가 경외했던 무의미를 꾸준히 누리고 있었다. 효율적이거나 생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방치했던 많은 것이 그를 통해 다시 인간적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찢어버릴 사진들임에도 매일같이 나뭇잎을 찍어 비싼 돈을 주고 현상하거나, 코모레비에 싹 틔운 잡초를 집으로 옮겨와 정성껏 기르고,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시기 위해 매번 동전을 챙기는 행위는 참 무의미하거나 비효율적이지만, 다시 말해 인간적이다.
히라야마가 느끼는 무의미적 행복은 내 주변에도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볕뉘를 느끼기 위해 머물렀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무엇을 좇느라 그 사소하지만 귀중한 것들을 지나쳤는지, 나는 그동안 얼마나 무의미할 수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효율만이 목적이 아닌 삶은 참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