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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화장대에서 디깅한 1990년 향수가 지금 쿨한 이유

가장 직관적이고 완벽한 도파민. 엄마 화장대에서 ‘디깅’한 1990년대 향수의 쿨한 역습.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베르사체 ‘블루진 오 드 뚜왈렛’ 톡 쏘는 콜라처럼 시트러스와 바닐라, 머스크가 청량하게 조화를 이루는 향기. 격식을 걷어낸 블루진처럼 자유분방하다. 제니퍼 로페즈 ‘글로우 바이 제이로 오 드 뚜왈렛’ 은은한 비누의 고전 향수. 오렌지 플라워와 재스민이 어우러지며 여성미를 끌어올린다. 아르마니 뷰티 ‘아쿠아 디 지오 오 드 뚜왈렛’ 지중해 푸른 바다의 프레시함을 담은 시트러스 계열 남성 향수. 중성적인 향을 즐기는 여성에게도 부담 없는 향. 캘빈클라인 ‘CK One 오 드 뚜왈렛’ 시트러스 향을 베이스로 한 유니섹스 향수. 청춘의 불완전함을 낭만으로 만들어버리는 자유로운 향취. 랄프 로렌 ‘랄프 오 드 뚜왈렛’ 봄날 캠퍼스의 낭만 같은 향기. 과즙이 터지는 듯한 그린 애플과 매그놀리아가 활기찬 플로럴 프루티 향을 완성한다. 크리스챤 디올 뷰티 ‘퓨어 쁘와종 오 드 퍼퓸’ 전설적인 원작 쁘와종의 강렬함을 맑게 재해석한 향. 소녀의 싱그러움과 여인의 성숙함이 공존하는 화이트 플로럴 계열

1998년 나의 등굣길. 가방 속에 교과서는 잊을지언정 절대 지키던 것들이 있었다. 파나소닉 CD 플레이어와 여분의 건전지, 그리고 캘빈클라인 ‘CK One’ 향수. 귀밑 3cm의 단발령과 교복이란 제약 속에 향수는 유일하고 합법적인 탈출구였다. 교복 셔츠 깃에서 배어나던 특유의 서늘한 시트러스 향, 그 중성적이고 오묘한 향은 그 시절 가장 쿨하고 완벽한 공기였다. 농구부 오빠 옆을 지날 때면 훅 하고 들어오던 땀 냄새 뒤섞인 다비도프 ‘쿨 워터’, 압구정로데오 거리를 누비던 대학생 언니들의 크리스챤 디올 뷰티 ‘쁘와종’, 엄마 화장대 주변에 스며든 에스티 로더 ‘플레져’ 향도 추억의 한 페이지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그 향기는 세월과 함께 증발했다. 그 여백을 잠식한 건 낯선 조향 공식과 껑충 뛴 가격으로 향수의 고급화를 부르짖는 니치 퍼퓸. 세상은 묵직한 우드와 가죽, 심연의 향신료가 빚어낸 딥한 조합을 갈구했다. 남들과 달라야 하는 취향의 고도화는 복잡한 수수께끼 같았고 우리는 미지의 향기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난해함이 정점에 달하자 다시 쉬운 것, 직관적인 것, 호불호 없는 향을 찾는 니즈가 늘고 있다. 바야흐로 ‘아는 향’, 클래식의 역습이다.

클래식 향수의 미덕은 ‘1차원적 쾌감’에 있다. 복잡한 연산도, 잔향의 서사를 기다릴 인내심도 필요 없다. 코끝에 닿는 순간 결론 나는 명징한 첫인상. 조향사로 활동하는 정미순 지엔퍼퓸 스쿨 원장도 단순한 향의 구조가 1990년대 향수의 매력이라고 꼽는다. “1990년대 향수는 향의 피라미드 문법을 철저히 따릅니다. 대중가요의 1절, 후렴, 엔딩처럼 기승전결이 딱 맞아떨어지죠. 니치 퍼퓸이 해석의 여지를 두면서 어렵지만 멋진 향을 추구한다면 1990년대 향수는 상큼함, 달콤함, 시원함 같은 조향사의 의도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게 특징입니다.” 그야말로 뇌에 과부하 걸린 현대인에게 킬링 타임용 영화 같은 완벽한 도파민인 셈이다.

이 흥미로운 역주행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업계 관계자들은 니치 향수의 범람이 부모님의 화장대로 젠지를 이끌었다고 말한다. 빈티지 향수를 디깅하는 것이 Z세대에게 오히려 남들과 구별되는 확실한 개성의 표현이 되었다는 것. “온라인 세상에 사는 Z세대에게 1990년대는 인터넷 이전의 유토피아를 상징합니다. 그들에게 이 향수는 낡은 유물이 아니라 재발견된 보물이죠. 즉 향기 그 자체라기보다 그들이 살아보지 못한 시대의 바이브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뷰티 디렉터 사라 조셀(Sarah Jossel)은 기사에서 이 현상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과연 1990년대의 축복은 어디까지일까?

거대한 역주행에는 결정적인 ‘한 방’도 있었다. 배우 손예진이 <보그> 유튜브를 통해 ‘절대 비밀’에 부쳤다는 시그니처 향수로 ‘글로우 바이 제이로’를 공개한 사건처럼 말이다. “인 마이 백 공개 이후 많은 SNS에 바이럴되며 매출이 500% 수직 상승했습니다. 올리브영에서 품절 대란을 빚고 향수 카테고리 랭킹 1위를 단숨에 탈환한 뒤 현재도 우상향 중이죠.” 이 향수의 유통사인 씨이오인터내셔널의 홍보 담당자 김혜원은 전한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 3>의 쿄카도 Y2K 향수를 젠지 문화로 확장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랄프 로렌 ‘랄프’가 그녀의 ‘찐애장템’이라는 것이 방송에서 우연히 공개된 후 젠지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잊혀가던 파란색 보틀이 현재 가장 트렌디한 댄서의 ‘최애’라는 사실은 200%가 넘는 매출 신장률로 증명됐다.

경기 침체의 파고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던 ‘립스틱 효과’ 공식이 이제 향기로 전이되었다는 분석도 일리가 있다. 향기는 입술 색을 바꾸는 것만큼 기분과 공기, 분위기 환기에 효과적이지만, 백이나 옷처럼 로고를 드러내 과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일부 소비자는 공기 중에 흩어지는 무형의 자기만족에 40만원을 태우는 대신, 4분의 1 가격표를 단 실속 있는 패션 향수로 다시 눈을 돌리는 중이다. 보이지 않는 사치의 거품을 걷어내고 합리적인 ‘스몰 럭셔리’를 택한 영민한 타협이다.

물론 과거의 영광이 돌아왔다는 것이 니치 향수의 몰락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향의 세계가 확장되고, 세대와 지위를 막론하고 ‘취향’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신호다. 중요한 건 가격표와 브랜드의 권위가 아니라 진정한 취향의 발견이고,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쿨한 태도. 묵직한 니치 향수와 투명한 비누 향기를 자유롭게 오가는 유연함은 물론이다. 오직 후각적 감각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 향수 컬렉션을 완성할 수 있다. 오늘의 낭만과 객기, 장면을 영원히 밀봉해줄, 바로 그런 향 말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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