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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단종의 비극에서 ‘웃음’을 찾아내는 상상력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왕과 사는 남자>의 ‘왕’은 ‘단종’이다. 세종대왕의 적장손으로 10세에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6대 국왕이었던 그는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등된 뒤 16세에 사망했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한 명일 것이다. 당연히 단종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가운데 슬프지 않고 비참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단종이 주인공인 작품이 거의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단종이 등장하는 사극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이었다. 비극이 예정된 이야기보다, 어린 조카를 내쫓아서라도 왕위를 찬탈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는 그런 단종의 이야기에서 ‘웃음’을 찾아내는 영화다. 그것도 유배를 떠난 강원도 영월에서 보낸 약 4개월을 배경으로 하면서 말이다. 물론 ‘웃음’이 있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비극이 아닐 수는 없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영화가 찾은 웃음의 실마리는 엄흥도라는 실존 인물이다. 그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단종의 시신은 영월의 동강에 버려졌다. 그의 시신을 거두어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있었다. 그런데도 엄흥도는 아들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한 뒤 집안의 선산에 안장했다. 영화는 엄흥도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그는 왜 집안이 멸절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는가. 그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단종이 불쌍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단정하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엄흥도와 인간적인 유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이었던 남자와 강원도 두메산골의 백성은 어떻게 친해졌을까. 여기에는 또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다.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영월의 어느 마을. 촌장인 엄흥도(유해진)는 고관대작이 유배 오면 마을이 번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목표는 소박하다. 마을 사람들이 쌀밥이라도 먹고 사는 것이다. 다행히 그의 마을은 새로운 유배지로 선정된다. 하지만 하필 이곳에 유배 온 인물은 폐위된 왕 이홍위(박지훈)다. 한양으로 복귀할 수도 있는 고관대작이라면 모르겠지만, 폐위된 왕은 사실상 죽은 목숨이다. 그렇게 이 마을에는 뜻하지 않은 ‘화근’이 찾아온 것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왕과 사는 남자>의 이야기는 사실 그리 특별하지 않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버티고 있는 이홍위는 식음을 전폐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럼에도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바친다. 우여곡절 끝에 배가 고파진 왕이 한 숟가락을 뜨는 순간, 이들 사이의 경계도 허물어진다. 식욕을 되찾은 왕은 마을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지식을 전해주며 아마도 그의 생애 가장 행복했을 시간을 보낸다. 행복감과 웃음이 끊이지 않는 순간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마음이 짠해지는 관객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사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 또한 그런 균형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년의 표정부터, 산에서 맞닥뜨린 호랑이를 향해 활을 쏘는 기개까지. 분명 박지훈의 연기 경력은 <왕과 사는 남자> 이후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여기에 유해진은 익숙한 스토리를 생생하게 만들고 있으며, 한명회를 연기한 유지태는 거스를 수 없는 막강한 장벽 그 자체를 보여준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대체 역사물을 제외하고, 그동안 단종의 서사를 그려온 수많은 사극 영화와 드라마의 연대기로 볼 때 <왕과 사는 남자>는 가장 뚜렷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지금까지 묘사되어온 것과 달리, 단종이 그렇게 무기력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 때문이다. 영화는 죽어간 신하들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 있다가 생의 의지를 찾고, 다시 자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단종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끝내 자신을 폐위시킨 세력의 손에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까지 담아낸다. 그 외에 새로운 무언가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탄의 역사에 웃음과 의지를 불어넣은 상상력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인생이 그렇듯 단종도 울기만 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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