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욱 “저는 내일만 삽니다”
내일의 이진욱은.
GQ 오늘이 수염을 밀 수 있는 단 3일 중 하루라고요.
JU 네, 첫날입니다. 어색해요. 거울 볼 때마다. 어?
GQ 촬영 중인 작품 <타이고> 때문인가요?
JU 맞습니다. 서울 분량 촬영은 끝났고 이제 해외 촬영 분량이 남았습니다.
GQ 용병 타이고와 대립하는 범죄 조직원 이야기에서 이진욱 씨는 후자죠.
JU 나쁜 놈이에요.
GQ 아직 촬영 중이니 더 많은 이야기는 나중에 작품으로 보고 대신 하나만 물을게요. <타이고> 촬영하면서 찬물 샤워한 적 있어요?
JU 찬물 샤워, 아니요 못 했습니다. 시작하면서부터 독감에 걸렸거든요. 세 달 가까이 고생했어요. 찬물 샤워는 안 하는 게 좋다고 챗 지피티가 그러더군요.
GQ 실제로 찬물 샤워를 즐겨요? 정신을 번쩍 차리고 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서 한다던 말이 재밌으면서도 긴가민가했어요. 농담인가 아닌가.
JU 어, 그건 약간 웃기려고 한 얘기이긴 했는데(웃음), 그런데 즐긴다기보다는 종종 합니다. 냉수욕의 장점은 많이 나와 있으니까요. 아! 했네요! 했어요. 액션신 찍고. 굉장히 추운 날 찬물에 들어갔다가 너무 차가워서 3분도 못 했어요.
GQ 그때는 왜 했어요? 추운 날인데.
JU 근육통이 있을 때는, 그렇게 액션이나 심하게 운동한 당일에는 냉수욕이 젖산 분해하는 데 도움도 되고 고통도 줄여주고 부기도 빼주고 한다더라고요.
GQ 역시 실용적인 의미에서군요.
JU 정신도 번쩍 나요. 나약해진 어떤 정신 상태가 번쩍하고 뜨이는 게 있죠.
GQ 오늘 여기 서울 근교인 촬영 장소로 오면서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JU 그렇죠? 정원도 멋있고.
GQ 이곳을 무인도라고 여기고 오늘 이진욱의 기분을 담아 노래 하나 고른다면?
JU 골라볼까요? 그렇다면···, 이게 좋을 것 같아요. (재생한다.) 엑스 재팬의 ‘Art Of Life’. 29분짜리 곡입니다. 지인짜 긴데 지인짜 좋아해요. 제가 한창 좋아할 때는 자장가였어요. 이 노래 들으면서 잤어요, 저 고등학생 때.
GQ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곡이에요?
JU 응, 근데 오늘 날씨하고도 너무 잘 어울리고.
GQ 틀어놓고 인터뷰할까요?
JU 도입부까지는 들으셔야 돼요. 여기 수장인 요시키가 드러머인데 완벽주의자라 녹음할 때 멤버들을 너무너무 괴롭혔대요. 첫 도입부 가사가 기가 막혀요.
GQ 뭐예요?
JU 장미여, 왜 너는 혼자 피었나.
GQ 무인도에 가져갈 것에 꼽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궁금했어요.
JU 너무 좋아하죠. 음악 안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말도 하기 싫습니다.
GQ 덕분에 저는 오는 길에 ‘베토벤 7번 교향곡’을 들었어요.
JU 너무 좋죠?
GQ 너무 좋아요. 과거에 현지에서 불현듯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을 보러 갔고, 마침 그날 공연이 벨 소리로 해둘 만큼 좋아한 ‘베토벤 7번 교향곡’이었다던 일화가 제3자 입장에서도 신기하고 기분 좋았어요.
JU 진짜, 진짜 짜릿한 일이죠. 그때 베를린에서 촬영한 뒤 혼자 이틀 정도 더 남아 있었어요. 아, 베를린 필이 있었지? 생각나서 갔는데 레퍼토리에 어? 제가 좋아하는 곡인 거예요. 너무 신기하잖아요. 그리고 나름대로 클래식을 좋아하니까 혹시 몰라서 옷을 준비해갔어요. (클래식 공연 보는 데) 꼭 그럴 필요는 없거든요? 공연을 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깔끔한 옷과 구두를 준비해갔어요.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추운 거예요. 그래서 코트도 사서 입었어요. 부슬비가 내리는 밤에 갔어요. 자전거를 타고. (공연 영상을 찾아 보여준다.) 보통 좋아하는 음악이 어디서 흘러나와도 좋고 좋아하는 타이밍에 들어도 좋은데, 우연히 본 공연에서 내가 좋아하는 곡이라니. 최고죠, 최고.
GQ 베토벤 7번은 왜 좋아하게 됐어요?
JU 교향곡을 좋아하고 보통 2악장이 서정적이라서 대개 2악장을 좋아해요. 베토벤 7번은 예전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2006)에 나왔어요.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그러면서 그 시즌에 그 곡을 진짜 좋아했어요.
GQ 특히 2악장을 좋아하군요. 파고들지 않으면 잘 모르는 묘사예요.
JU 응, 그런데 교향곡 구성이라는 걸 공부했다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보니 대부분 2악장이었어요. 보통 처음 듣는 사람은 2악장이 듣기 편해요. 서정적인 선율이라서. 귀에도 잘 들어오고. 듣다 보면 앞뒤 것도 듣게 되니까 그러면서 어떤 구성도 이해하고 흐름도 이해하고. 그런 게 흥미롭죠.
GQ 이진욱이라는 사람이 지나온 인생에서 어느 한 챕터를 갈무리하면서 기념품이라 할 만한 것 하나를 꺼내놓는다면 어떨까요?
JU 글쎄요.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사는 타입이 아니라서 그런 질문은 저한테 어렵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고 사는 타입이라.
GQ 또 다른 신작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 시 조찬모임>에서 빌려온 질문이었어요. 거기서는 실연의 기념품을 꺼내죠.
JU 아, 그렇죠. 맞아요. 그걸 찍으면서도 더 느꼈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구나.
GQ 아니구나.
JU 저 같은 성향이 더 간편한 것 같긴 해요. 그나마, 그나마 사진을 가끔 찾아보는 것 같아요. 어느 시기에 사진을 좀 찍어둘걸, 후회하는 적이 많죠. 근데 바뀌진 않아요. 여전히 찍게 되지는 않아요.
GQ 대충 대답이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어떤 시기가 유난히 아쉬워요?
JU 그게 그냥 어떤 순간 같아요. 친구들하고의 한때라든가. 그립다기보다 어떤 그 시기, 나이 들면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음···,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흐른다고 말하잖아요. 그게 와닿는 나이가 됐죠. 시작됐죠.
GQ 너무 빠르죠?
JU 너무 빠르죠. 그리고 흐르는 물이라는 걸 보면은 정말, 생각하면 안타깝거든요. 물은 흘러가잖아요. 시간도 마찬가지예요. 흘러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
GQ 몇 해 전에 스스로 “필모가 중구난방인 배우”라고 했어요. “이제 남은 시간을 좀 가져가야 할 것 같기는 해요”라고도요. 어떤 방향성을 가져가고 싶어요?
JU 글쎄요. 제가 연기한 지 한 20년쯤 돼가는 것 같은데 이제 좀 뭔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래서 앞으로는···, 이걸 깨닫기 시작하면 배우들이 후회가 되거든요? 그 전에 했던 작품들이.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든가 ‘아, 아쉽다’라는 감정 정도로 정리가 될 텐데, 그런 면에서 설레는 것 같아요.
GQ 오히려.
JU 뭐 어떤 식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라기보다 그냥 ‘그 순간을 더 즐겨야겠다’라는. 작품은 앞으로도 중구난방일 겁니다.
GQ 의미 없는 질문이지 싶었어요. 애초에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JU 그렇죠. 그래도 작품 정도는 자기가 좀 조율하면서, 좀 조정하면서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저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타입이라.
GQ 그러고 보면 이진욱 씨가 방향성이라는 단어를 쓴 건 아니에요. 생략된 목적어를 맥락상 방향성이라고 여겼지 살펴보면 그 단어를 쓴 건 아니란 말이죠.
JU 어, 어. 방향성을 가져간다고 말했을 리가 없는데.
GQ 그러니까. 뭘 가져가고 싶었을까?
JU 그러게. 뭘 가져가고 싶을까?
GQ 방향성은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JU 네. 방향성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아요 저는. 저는 내일만 삽니다.
GQ 오늘만 살진 않네요.
JU 오늘만 살진 않아요. 하하하하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내일만 삽니다. 뭐, 솔직하게 얘기하면 한 일주일만 삽니다. 이유는 제가 살아 있을지 죽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 앞만 내다보면서 삽니다.
GQ 좀 알려주세요. 일주일 앞만 보고 사는 법.
JU 연습하면 돼요. 죽음을 가까이 두면 모든 것에 좀 초연해질 수 있어요.
GQ 그러게요. 종종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알아요. 애초에 어쩌다 죽음을 가까이 생각하게 됐어요?
JU 그건 성향 같아요. 예전에 <검은 고양이>를 쓴 에드거 앨런 포의 수필을 봤는데, 그가 어릴 때 쓴 글이었나 봐요. 세상을 밝게 보는 게 어렵다, 난 세상을 어둠으로 바라본다, 그런 글이었어요. 그게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시각에는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그 시각이 저는 죽음을 통해 바라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부정적이거나 어두운 게 아니라.
GQ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까 오늘 열심히 살아야 한다, 이런 건가?
JU 간단히 말하면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런데 그건 약간 극단적이고(웃음) 음···, 그것의 반대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보는 거죠. 소중함에 대해서. 죽음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끝이잖아요. 내세는 모르는 거고 죽으면 그야말로 단절이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어요. 살면서 겪는 것들에 대해서.
GQ 그래서 소중하다.
JU 그래서 소중하다. 죽으면 끝인데.
GQ “목 놓아 운다”라는 대본 지문, “아주 행복해한다”라는 지문이 어렵다 했죠.
JU 지금도 어려워요. 그런데 “목 놓아 운다”보다는 “너무 행복하다”, “감격스럽다”, 이게 진짜 어렵죠. 감정이 그렇게 가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보통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만큼 가본 적이 없어요. ‘저렇게 좋을 수가 있나?’ 그런 느낌? ‘저렇게까지?’. 어려워요. 어려운 문제예요.
GQ 연기를 떠나서 이진욱이란 사람 자체가 ‘그렇게까지’가 아니군요.
JU 맞아요. 감정이 거기까지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일반적으로 드러나게 표현되는 사람은 아니에요. 감격스럽고 좋은 게 있죠. 근데 막 그렇게···.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들이 있거든요, 어떤 장면들이? 그건 어렵긴 하죠.
GQ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JU 고민을 많이 하니까요.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가능합니다. 배우는 그걸 훈련하고 해보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다른 캐릭터들을 연기하면서. 자신을 탐구하는 게 일이기도 하니까요, 배우는. 그러면서 생각이 들죠. 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어떤 감정, 그 레벨보다 (중간 지점에 선을 긋곤 그보다 낮게 다시 선을 그리며) 좀 낮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때의 저를 보면 ‘기분이 안 좋은가? 우울한가?’라고 느낄 수 있죠.
GQ 그 선보다 위에 있다 생각했어요. 오늘 현장을 이끄는 분위기를 보면서.
JU 어, 그럴 때는 그럴 수 있죠.
GQ 하지만 기본 내저는.
JU 응, 그 모습이 기본은 아니니까. 사람들 대할 때는 이미 다 다른 상태잖아요.
GQ 사실 무척 궁금했는데 직접 보질 못 해서 묻어두었던 이야기가 있어요. <오늘의 죠>인가 <내일의 죠>인가, 한국어 번역판 제목으로는 <허리케인 죠>. 그게 이진욱 감성의 기반이 되는 작품 중 하나라고 알아요.
JU 어, <내일의 죠>. 맞아요.
GQ 우선 저처럼 보지 못한 이를 위해 소개한다면 이진욱식 해설은 어떤가요?
JU 처절한 인생을 살다 간, 처절하다는 건 불행하다기보다도 삶 자체를 진지하게, 아주 순수하게, 처절하게 살다 간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GQ 언제 본 거예요?
JU 2000년 초반쯤?
GQ 제법 성인이 되어서 본 거네요.
JU 그 전에는 일본 문화 수입 금지였어요. 그 옛날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답니다.
GQ 감성을 이룬 작품이라 해서 훨씬 어릴 때 봤으리라 예상했어요.
JU 그 전까지는···, 아, 이 얘기하면 너무 또 깊어지는데. 건조한 사람이라, 이렇게 세상에 나와 사회의 어떤 것들을 막 받아들이고 감정이 커나갈 때,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어른이 되어갔죠. 요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일 거예요.
GQ 이진욱 씨 감성의 바탕으로 삼은 것, 어른의 자양분으로 삼은 것은 뭐예요?
JU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그렇게 순수하게 끝까지 추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요즘은 더더군다나. 유혹도 많고 편안해지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 모든 걸 다 불태우는, 자신 자체를 불태우는. 결국 주인공이 죽거든요. 그만뒀으면 안 죽는데. 자기는 싸우기 위해 태어났다고, 싸울 거라고 끝까지 해요. 챔피언을 꺾겠다고. 챔피언이 되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최강의 복서를 꺾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결국엔 못 꺾어요.
GQ 아.
JU 그냥, 그걸로 된 거예요. 죽는 그 순간까지 도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응. 근데 이게 권장하는 바는 아니에요. 이렇게 살면 안 되죠. 요즘에는.
GQ 왜요?
JU 안 되죠, 안 되죠. 젊은 나이에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GQ 진심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JU 저는 권장하진 않아요. 저는 배우니까 이런 감성을 느끼고 공감하면서 연기로 회수하는 거지, 바람직한 삶은 아니죠.
GQ 왜 이렇게 제목이 헷갈리지, <오늘의 죠>예요, <내일의 죠>예요?
JU 하하하하하. <오늘의 죠>는 뭔가 좀 이상하잖아. 내일. 내일은 살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