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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심미안, ‘로버트 리먼 컬렉션’

로버트 리먼(Robert Lehman)을 아시나요? 리먼은 미국의 유명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의 파트너이자 수장이며, 20세기 미국 금융계를 이끈 인물이죠. 하지만 그런 그가 매우 열정적인 컬렉터였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로버트 리먼은 19세기 후반 인상주의부터 20세기 초 모더니즘까지 프랑스 회화에 관심이 깊었다고 하는데요. 1891년에 태어나 1969년에 세상을 뜬 그는 자신은 물론 그의 아버지부터 대를 이어 수집한 3,000여 점의 작품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대거 기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메트로폴리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별도의 전시 공간이 마련되었고, 특히 뉴욕 대저택 내부 분위기를 고스란히 재현한 공간은 50여 년 전부터 이슈가 되어왔습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모습.

뉴욕 여행길에 직접 가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미국 현대미술계에서 중요한 프라이빗 컬렉션 중 하나로 꼽히는 리먼 소장품의 일부를 서울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까요. 오는 3월 1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로버트 리먼 컬렉션>은 회화와 드로잉 81점을 공개합니다. 19세기 후반 일상의 풍경을 밝은 색채와 특유의 붓놀림으로 그린 독창적인 작품은 세계 미술사를 새로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빛을 머금은 물결,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 자연의 요소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떨림과 파장… 당대 화가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그린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알프레드 시슬레, ‘밤나무 길’, 1878, 캔버스에 유화, 50.2×61cm
테오도르 루소, ‘연못’, 1855, 목판에 유화, 34.3×51.8cm

물론 이번 전시가 인상파 화가들의 대작으로만 구성된 건 아닙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피는 과수원’ 등을 제외하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점이 더 흥미로웠는데요. 로버트 리먼은 어떤 사조나 트렌드가 아니라 자신만의 심미안에 충실한 소장가였습니다. 작품을 둘러싼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감동적이거나 영감을 선사하는 작품에 온전히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고난도의 컬렉팅일 겁니다. 덕분에 저는 전시 초입에서 아주 재미있는 작품,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살바도르 달리가 모사한 그림 ‘레이스를 뜨는 여인’을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요. 다른 인상주의 관련 전시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컬렉터의 개성이 드러나는 작업입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 1892, 캔버스에 유화, 111.8×86.4cm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과수원’, 1888, 캔버스에 유화, 72.4×53.3cm

‘레이스를 뜨는 여인’은 컬렉터의 열정과 화가의 호기심이 탄생시킨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페르메이르의 작업을 소장하지 못했던 리먼은 마침 달리가 페르메이르 작업의 복제품이 걸린 집에서 자랐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달리에게 이 그림을 직접 모사해달라 의뢰했다는군요. 달리의 그림에서는 확실히 원작보다 다소 거칠지만 한결 힘찬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 남다른 작품을 시작으로 예상보다 오래, 어느 때보다도 마음 편히 인상주의 화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봤습니다. 전시에서 중요한 건 작품의 명성이 아니니까요.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 빛과 색, 그리고 순간을 포착한 화가들의 작업은 그저 혁신적인 미술사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발 딛고 살았던 자연과 소중한 사람들, 삶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 세상의 조롱을 받았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수백 년 후 모두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요?

폴 고갱,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 1892, 종이에 유화, 캔버스에 붙임, 109.9×89.5cm
메리 커샛, ‘봄: 정원에 서 있는 마고’, 1900, 캔버스에 유화, 67.9×57.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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