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디달고 다디단 이 로맨스 ‘은애하는 도적님아’
<은애하는 도적님아>(KBS2)가 서브컬처 로맨스 팬들의 호평 속에 시청률 6%대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주인공 커플의 영혼이 뒤바뀐다는 설정, 액션이 결합된 퓨전 사극, 부패한 사대부와 왕족의 대립 등 여러 요소가 최근 히트작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MBC)와 겹친다. 하지만 남지현, 문상민의 사랑스러운 앙상블이 이 클리셰 모둠에 다시 한번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2020년 스튜디오드래곤 극본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을 바탕으로 했고, 드라마 방영을 앞두고 같은 IP를 활용한 웹툰 연재가 시작되었다.
주인공 홍은조(남지현)는 양반 아버지와 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얼녀’다. 생부이자 주인인 홍민직(김석훈)은 왕에게 직언을 하다가 몰락한 충신으로, 노비인 은조 모녀를 본가족처럼 아끼지만 생활력은 떨어지는 인물이다. 그를 대신해 은조가 혜민서 의녀로 일하며 가족을 건사하고 있다. 그런데 은조에게는 비밀이 있다. 밤이 되면 그는 탈을 쓰고 의적 길동으로 변해 탐관오리의 곳간을 턴다. 굶주린 환자들을 먹이기 위해서다. 남지현이 연기하는 홍은조는 믿음직스럽다. 의연하고 단단한 은조가 배우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다.
남주인공 이열, 도월대군(문상민)은 대비의 친자이자 왕의 이복동생이다. 그는 어머니의 야망, 형의 경계심, 사대부의 권력 투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철부지 시늉을 한다. 하지만 실은 그도 성정이 바른 사람이다. 취미 삼아 포청 종사관 노릇을 하던 도월대군은 수배자인 길동에게 흥미를 느낀다. 길동을 잡아서 실력을 뽐내겠다 벼르지만 막상 자기 추리가 적중해 길동을 마주치자 관군을 따돌리고 그를 도피시킨다. 왕자임에도 백성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자신이 길동 앞에서는 유독 부끄럽다. 그래서 도월대군은 길동이 건네준 간신들의 비밀 장부를 버리지 못한다. 그 장부가 화근이 되어 대군은 평생 회피하던 정쟁의 한가운데로 빨려들어간다.
여자와 남자로서 흥은조와 이열의 관계는 길동-도월대군의 파트너십과 병행해 전개되는데, 다분히 도식적인 탐관오리 응징 서사와 달리 이쪽이야말로 조선 시대 신분제를 완전히 해체하고 재구성한 순도 높은 판타지로 보인다.
은조는 조선 최악의 간신인 도승지 임사형(최원영) 집안과 혼인을 앞두고 있다. 그것도 임사형의 자제가 아니라 다 죽어가는 70대 부친의 첩 자리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여자의 삶은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해진 은조는 자신이 전날 저잣거리에서 흉포한 양반으로부터 구해냈던 잘생긴 노비에게 충동적으로 키스를 해버린다. 하지만 그는 진짜 노비가 아니라 잠깐 남루한 행색을 한 도월대군이었고, 이 일로 대군은 은조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신분을 넘어선 철벽녀와 직진남의 만남이 이어진다. 여기에 임사형의 얼자이나 정략결혼을 위해 양반으로 길러진 콤플렉스 덩어리 임재이(홍민기)가 은조에게 묘한 집착을 보이면서 작품의 긴장감이 높아진다.
영혼 교환 이벤트는 동자승의 선물을 매개로 벌어진다. 길동이 관군의 활에 맞고 쓰러진 순간 두 사람의 혼이 바뀐다. 대군이 된 은조는 의학 상식을 이용해 누군가 왕을 위해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대비와 이열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은조가 된 이열은 형의 후궁이 임사형과 나누는 위험한 대화를 엿듣고, 은조를 괴롭히는 그 집안 남자들을 유교 논리로 굴복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사건의 심각성을 눈치채기도 전에 간신의 칼끝이 은조와 이열을 향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두 영혼이 제 몸을 찾아간다.
이 작품의 로맨스는 신분 차이와 정치적 위기라는 구질구질한 상황에도 꽤 쾌적하게 느껴지는데, 인물들의 성격과 연기가 모두 깔끔한 덕분이다.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이처럼 신분 차가 많이 나는 커플을 그릴 때 여주인공의 근성을 강조하기 위해 남주인공을 이기적이고 무식한 불리나 권위적인 인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그런 뻔한 함정을 피해간다.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 역은 임사형 일가가 가져가고, 이열은 은조에게 예쁘게 순정을 바친다. 은조 역시 귀여운 척 호들갑을 떨거나 부러 익살을 부리는 ‘로코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마냥 속없는 캔디도 아니다. 두 캐릭터는 각자의 몫을 해내며 서로를 배려하는 균형 있는 파트너십을 보여준다.
문상민의 부드럽지만 가볍지 않은 외모와 발성, 안정된 연기는 남지현의 중성적인 매력과 멋지게 조화를 이룬다. 덕분에 우직한 여자 은조와 청순한 남자 이열, 의적 길동과 성군의 자질을 숨긴 대군이라는 이중의 역학 관계가 잘 전달되고 있다. 영혼이 바뀌었을 때 상대의 제스처와 말투를 재연하는 연기도 과장 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이 커플이 주는 중독성 있는 설렘 덕에 퓨전 사극 로맨스의 유효기간이 또 한 번 갱신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