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입, 제주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한여름의 제주는 처음인데!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이라 한낮의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기세등등 강렬하다. 강하고 약한 바람이 내내 불지만 날카롭지는 않다. 오히려 부드럽게 느껴진다. 제주는 머물 때마다 편안하다. 아마도 마음에 먼지가 잔뜩 끼었을 때, 마음이 내내 어수선하고 분주하고 산만할 때 도망치듯 제주를 찾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는 곳에서 멀리, 그것도 바다를 건너 외딴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면, 내가 정말로 있던 곳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곳에 와 있구나 싶은 것이다. 거기에서 오는 간극이 만들어내는 안도가 있다. 너무 밀착해 있지 않고, 그렇다고 격조하지도 않은 틈과 사이가 필요하다. 일과 사람으로부터 한발 떨어져 잠시나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온전히 내가 나의 시간, 공간, 하루의 주도권을 쥔다는 의식적인 생각과 감각, 그것이 만들어내는 안정과 편안함.
여행을 가면 그곳의 작은 독립 서점에 들른다. 역시나 이번에도! 한낮의 무시무시한 볕을 받아내며 몇 번 찾은 적 있는 자그마한 책방으로 서둘러 들어선다. 공간의 크기와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자그마한 공간에 폐를 끼치지 말아야지 싶어 저절로 몸놀림도 목소리도 작고 조심스러워진다. 불편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주인장이 정성스레 차려낸 밥상을 받아 안듯, 많지는 않지만 특색 있는 책들을 하나씩 훑어나간다. 그곳에서 한 권의 책을 뽑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죽음의 병>(2022, 난다)이다. 제목이 주는 묵직함에 여행자의 책으로 적절할지 잘 모르겠으면서도, 강렬함에 끌려 이 책을 선택한다.
소설과 연극, 영화를 오가며 열정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의 후기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죽음의 병>은 뒤라스가 2년여의 집필 기간을 거쳐 1982년에 펴낸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80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96년까지 함께한 연인 얀 앙드레아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라스는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죽음의 병>을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더 이상 지울 수 없을 만큼 얇아지도록, 최대한 지워냈”으며, “우리 안에 남겨질 것과 일치하게 될 텍스트.”(85쪽)
<죽음의 병>은 이인칭의 ‘당신’이라 불리는 남자와 ‘여자’라고 지칭되는 삼인칭 사이의 대화와 짧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당신’이라 지칭되는 남자는 사랑을 위한다는 이유로 돈을 지불하고 여자를 산다. 여자는 계약을 받아들이고 그들은 며칠 밤을 함께 보낸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모든 요구에 복종할 것을 부탁하고 사랑을 시도한다. 하지만 육체적 소유는 실패로 끝난다. 욕망할수록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긴다. 여자는 그가 ‘죽음의 병’에 걸렸다고 한다.
‘당신은 여자에게 묻는다: 죽음의 병이 어떤 점에서 치명적이지요? 여자가 대답한다: 이 병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병에 걸린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요. 또한 죽기 전에 삶을 가져보지 못한 채, 어떤 삶도 없이 죽는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사람이 죽으리라는 점에서요.’(27~28쪽)
여자를 지배하고자 할수록 사랑받고자 하는 남자의 욕망 또한 커진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은 여자에게 당신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당신은 여자에게 묻는다: 죽음 때문에요? 여자가 말한다: 그래요, 당신의 감정이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꿈쩍하지도 않기 때문에, 바다가 검다고 말하는 그 거짓말 때문에요.’(57쪽)
그리하여 남자는 끝끝내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리라. 욕망과 사랑에 실패하리라.
‘당신은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리라. 당신이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반쯤 열려 있거나 감긴 눈 아래 잠들어 있는 여자의 몸뿐이다. 몸들의 관통, 당신은 그것을 알아볼 수 없다, 당신은 절대로 알아볼 수 없다. 당신은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울었을 때, 그것은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였지, 당신들 두 사람을 갈라놓은 차이를 넘어 여자와 다시 만나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불가능하기 때문은 아니었다.’(66~67쪽)
그와 반대로 여자는 가공할 힘으로, 연약하지만 불굴의 힘으로, 그럼에도 선연히, 이 상황의 주도권을 쥘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당신을 위해서만 치러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의 사랑을, 미처 싹트기도 전에 잃어버리면서, 살아낼 수 있었다.’(68쪽)
<죽음의 병>의 독자인 우리는 ‘당신’이라는 이 남자에게 거리를 두면서도 그에게 자신을 대입해보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이 책의 옮긴이인 조재룡 문학평론가는 그것을 이렇게 평한다.
‘독자들은 이렇게 ‘당신’에게 빨려들어가고, ‘당신’은 읽는 ‘나’가 되고, 읽는 ‘나’는 ‘당신’이 되는 이상한 교환이 일어나 일종의 공동체적인 인칭이 탄생한다. 뒤라스는 이 불가사의하며 되돌아오는 말, 주문을 거는 듯한 말로 독자들을 비극적인 공동체로 데려간다. 쓰기와 읽기는 그러니까 “공유하기”와 다르지 않다. “책과 독서 사이의 사적인 관계” 속에서 이렇게 “우리는 함께 불평하고 운다.”’(86~87쪽)
뒤라스의 앞선 말, ‘우리 안에 남겨질 것과 일치’와 평론가의 ‘공동체적 일치’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제주에서 우연히 찾은 책, 읽기 사이의 사적인 관계를 생각한다. ‘그럼, 이제 나도 쓰면 될까.’ ‘더 이상 지울 수 없을 만큼 얇아지도록, 최대한 지워내’는 작업으로서의 쓰기를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