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모든 시작점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들이 모여있는 팀이라고 느껴요”
하정우, 몇몇의 면면.
GQ 제 인생 첫 연극이 2003년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졸업 작품 <오셀로>예요.
JW 맘마미아.
GQ 가슴에 뜨거운 것을 왈칵 쏟은 것처럼 뜨거워졌던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아요. 무대 위 배우들이 이렇게 크구나, 큰 존재구나, 처음 느꼈죠.(실제로 그가 물리적으로 ‘큰’ 사람인 건 나중에 알았다.)
JW <오셀로>는 진짜 기억에 남는 작품이에요. 그때 영화 <실미도>의 병사 역할로 붙었는데, <실미도>를 할지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셀로>에서 주인공을 하고 졸업을 할지 고민을 ‘때리다’가 결정했죠. 그래, 이런 작품을 언제 해보겠어. 그렇게 하게 된 마지막 졸업 작품이라서 7개월 동안 ‘영끌’해서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 작품으로 윤종빈 감독도 처음 만나고, 사이더스에도 들어가게 됐으니 결국 잘 한 선택이었죠.
GQ 예능 <두발로 티켓팅>에서도 한참 어린 중앙대학교 후배 여진구에게 “학교 다니면서 꼭 연극을 해보라”고 조언하더군요.
JW 배우에게 필수인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온몸을 다 써서 하는 것이니 걷는 것, 서 있는 것, 발성 같은 기본적인 훈련을 하고 연마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연극이 딱 시작되면 그다음부터는 연출자가 개입할 수 없는 시간이에요. 그 러닝 타임 동안은 오롯이 배우가 템포와 감정, 에너지로 이끌어 나가야 하죠. <오셀로> 준비하고 공연 올릴 때 저는 제가 세계 최고의 배우라고 믿었어요. 대학 연극 무대지만 그만큼 자신 있었고, 자부심과 에너지가 있었어요. 학교에서 하는 마지막 연극이라는 절실함도 있었고요. 오죽하면 배역에 익숙해지려고 전공 수업 시간에도 허리춤에 긴 칼을 차고 다녔다니까요. 스킨 헤드에 수염 기르고 링 귀고리 하고 긴 칼을 찼다고 생각해봐요. 어휴, 후배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
GQ 늘 ‘팀’, ‘함께 만드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연극에서부터 시작된 거예요?
JW 그렇죠, 그렇죠. 드라마, 영화도 그렇고 사람한테 영향을 주는 거잖아요. 등장인물이 또 다른 등장 인물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팀워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한테 영향을 받고, 사람을 통해 상처나 아픔을 겪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잖아요. 모든 시작점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룹, 팀이라고 느껴요. 그래서 저는 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GQ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JW 이번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을 예를 들면, 감독님과 호흡이 되게 좋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110회차 중 94회차에 출연했고, 저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만나거든요. 19년 만의 드라마인데 영화가 2시간 기준이라면 이 작품은 12부까지 12시간이니까, 방대한 스토리 안에서 여정이 길어서 유독 더 대화를 나눴어요. 감독님과 좋아하는 영화나 취향이 비슷해서 합의점을 찾는 게 빨랐죠. 그런 순간을 맞이하면 뭐랄까, 희열? 희열보다는 안도감이 들어요. 우리가 맞게 가고 있구나, 라는 안도. 우왕좌왕하지 않는 시간들이어서 더 확실해질 수 있었죠. 가고자 하는 길이 명확했고요.
GQ <로비>를 연출하고 감독에게 힘이 되는 배우가 되어야겠다 다짐했다고요.
JW 현장에서 100명 가까운 스태프와 함께 있지만 굉장히 고독한 자리거든요. 감독이 너무 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결정을 해야 하니까, 주연 배우가 알아서 자기의 한 축을 수행해나가는 것만큼 든든한 건 없다는 생각을 해요.
GQ 감독 하정우는 배우의 공복 상태를 잘 감지한다고, 박병은이 그러더군요.
JW 같은 배우를 몇 개월 동안 주야장천 바라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상태, 느낌인지 딱 느껴져요. 저는 배우이기도 하니까 조금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죠. 오늘은 코감기 기운이 있네? 어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오늘은 조금 예민해 보이네? 그럴 땐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맞춤 디렉션을 하려고 해요. 기분 풀어준다고 어줍잖게 농담 던졌다가 좋을 게 없어요. 한마디 더할 걸 덜하고, 그런 거죠. 맞춤 디렉션이라고 거창한 건 없어요. 심플해요.
GQ 캐릭터를 생각할 때 인물의 색깔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고요. 요즘도 그래요?
JW 그렇죠. 인물의 색도 그렇고, 인물이 입는 의상의 색으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이번 드라마에서는 초반에 녹색 계열의 옷을 많이 입었어요. 그리고 스포츠 브랜드나 풋볼 셔츠 같은 의상도요. 의상 피팅만 100번은 한 것 같아요.
GQ 초록색이 하정우에게는 어떤 색이에요?
JW 글쎄요. 자연의 색깔이고, 친근하고 보편적인 컬러죠. 제가 맡은 기수종도 보편적인 꿈, 보편적인 야망을 갖고 있는 인물이에요. 그러다 나중엔 흑화되지만. 녹색이 초반의 그런 면을 대변해 주지 않을까 했어요. 저는 평소에도 이유없이 그린 계열 컬러를 되게 좋아해요. 올리브 그린부터 에메랄드 그린까지.
GQ 맡은 인물의 컬러가 평소의 하정우로도 번져나가요?
JW 영향이 있겠죠?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진 않지만, 그러고 보니 작년에 유난히 풋볼 셔츠를 많이 샀네요.
GQ 책에 쓴 컬러 이야기도 그렇고, 아까 촬영할 때도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있는 것 같았어요. 모니터링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이미 모니터가 있는 듯이. 연출을 하고 그림을 그리기에 가능한 일일까요?
JW 찍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 이미지가 그려져요. 연륜이나 경험의 영향일 수도 있고, 말씀하신 대로 그림을 그려서일지도 몰라요. 저 렌즈 사이즈라면 여기서는 어떻게 포즈를 취하는 게 효과적이겠다, 느껴져요. 그래서 연극 얘기로 돌아가자면, 연극은 나의 전신을 다 사용해서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영화와 TV는 각 프레임의 사이즈가 있죠. 연극하던 사람이 매체 연기로 오면 스위치가 어려워요. 몸 쓰는 게 거칠죠. 프레임 밖으로 튀어나가기도 하고요. 아무리 표현해도 프레임 밖이라면 보는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잖아요. 저는 연극부터 매체 연기를 경험하면서 머릿속의 그림이 선명해진 거겠죠.
GQ 다시 연극할 계획도 있어요?
JW 매년 후배 연출가들에게 제안을 받고 있죠. 언젠가는 꼭 해야겠다,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GQ 갈증 같은 것이 있어요?
JW 갈증은 못 느끼지만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배우로 또 감독으로서 더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어야겠다는, 그게 갈증이네.
GQ 책에 쓴 표현이 좋았어요. “쌀로 밥을 짓듯 연기를 하고, 남은 것으로 술을 빚듯 그림을 그린다.”
JW 그런 생각할 때가 있었어요. 나는 그림을 왜 그릴까? 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추격자>를 찍을 때 매번 밤 촬영이라 촬영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아침 6시였어요. 다른 사람의 아침이 시작될 때 저의 밤이 시작된 거죠. 아침 해가 떠오르는데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저는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어요. 일종의 샤워 같은 느낌이었죠. 영혼의 샤워. 그때 그 표현이 떠올랐어요. 본업은 배우고, 쌀로 밥을 짓고 있었는데 제 안에 남아 있는 어떤 것으로 또 무언가를 하고 싶으니 술을 빚듯이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는 생각.
GQ 본업이 배우라는 건 영원히 변치 않는 사실처럼 말하네요?
JW 1번은 배우죠. 감독으로서 경력이 쌓이면 그 일이 앞으로 나올 수도 있겠지만, 본업은 당연히 배우죠.
GQ 출연한 영화 자주 봐요?
JW 연출한 영화는 자주 봐요. <롤러코스터>는 지금 혼자 봐도 너무 웃겨요.
GQ 자신이 연출한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감독들도 꽤 봤어요.
JW 영화를 보면 촬영할 때 일어난 일,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니까요. 찍는 순간에 신났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면 영화 이면의 기억이 좋게 남아서 그런 작품은 계속 보고 싶어요. 영화 자체보다 그때의 기억을 마주하기 버거워서 다시 보지 않는 작품도 있고요.
GQ <윗집 사람들>에서 “가슴에 국밥 쏟았어” 같은 대사는 어떻게 쓰는 건가요?
JW 오래된 기록과 메모와 조사.
GQ 주로 어떤 조사예요?
JW 만약 오늘 기자님이 무슨 얘기를 했는데 되게 느낌 있는 말이라고 느꼈어요. 그럼 일단 적어놔요. (휴대 전화 메모장을 보여주며) 여기에 대사들 있죠. 결혼은 뭐라고 생각해요?
GQ 아까 메모장에서 봤어요. “고향이 두 개가 되는 것.” 어디서 본 말이에요?
JW 일본 광고 카피를 묶어서 낸 책에서 봤어요. 제 메모장에 이런 말도 있네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지만 좋은 사람’.
GQ 통렬하군요.
JW 이런 느낌 있는 말들을 수집해 기록해두고 어느 영화, 어느 배우, 어느 대사에 넣을지를 생각해요. 배우로 출연할 때도, 감독할 때도 쓰죠. 그래서 “가슴에 국밥 쏟았어”로 돌아가면, <윗집 사람들>에서 제가 맡은 김선생이 한문 선생님 역이잖아요. 교편에 있으면 10대 아이들이 쓴 대사를 많이 들으니까 본인은 되게 MZ라고, 힙하고 쿨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한문 선생이면 문장력도 어휘력도 있을 텐데, MZ 같은 대사를 중간중간 섞으면 되게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10대들이 쓰는 말을 싹 다 조사했어요. 한 500문장 중에서 발췌한 게 “가슴에 국밥 쏟았어”였어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대사나 우디 앨런 영화 대사, 박민규 소설, 알랭드 보통도 좋아해요. 스탠드업 코미디도 많이 봐요. 재능에는 한계가 있고, 제가 무슨 점쟁이나 무당도 아닌데 갑자기 신내림 내린 듯 대사가 나오는 건 절대 아니니까요. 인풋이 있어야 하니까 많이 찾아보고 수집하고, 저만의 방식으로 변형해서 치려고 하죠.
GQ 타고나신 줄 알았는데.
JW 무울론 타고난 것도 있죠. 냄새를 잘 맡으니까. 느낌 있는 대사겠구나, 란 걸.
GQ ‘느낌 있는 것’의 기준은요?
JW 터칭. 그게 웃기게 오든, 슬프게 오든, 어떤 감정을 건드리는 것.
GQ 멋있는 것보다 더 위예요?
JW 멋있는 건 2D, 느낌 있는 건 4D.
GQ 코미디언 곽범, 엄지윤에게 대본 리딩을 시켜봤다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JW 메타 코미디 친구들, 기발하잖아요. 내가 뭔가 놓친 게 없는지, 올드한 부분이 없는지 그 친구들을 통해 더블 체크하기도 하고, 또 진짜 업으로 삼고 있는 친구들은 이 상황과 대사를 어떻게 소화할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실제로 그 친구들로부터 영감 받은 대사가 몇 가지 있어요. 그중 하나는 <윗집 사람들>에서 이하늬가 공효진의 벗은 몸을 보았다고 이야기하는 신이 있어요. 원 대사는 “원래 거기에 옷 벗고 서 계시지 않았냐”였는데, 엄지윤이 “거기에 옷 벗고 ‘우뚝’ 서 계시지 않았냐”라고 하는 거예요. 오케이, 우뚝.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이에 ‘우뚝’을 넣어서 결합하는 건 쉽지 않죠.
GQ 5년마다 책을 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하정우, 느낌 있다>, <걷는 사 람, 하정우>, 그다음은 어떤 책이 올까요?
JW 농담이라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 이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2018년에 <걷는 사람, 하정우>가 나오자 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걷는 인구가 엄청 늘었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농담에 좀 인색한 것 같아요. 블랙 코미디나 코미디에 대해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그것을 알랭드 보통처럼 풀어내면 어떨까 해요. 시작은 이렇게 하는 거죠. 제가 2020년에 해킹 당해서 협박범이랑 카톡을 주고받은 내용이 있잖아요. “난 지금 오들오들 오돌뼈가 됐다”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대화했는데,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유머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짐을 덜어주지 않나 싶어요. 안 그래도 사는 게 너무 힘든데 뭐 하러 그렇게 진지하고 심각해야 할까. 아까 옆방 벽에서 이런 말을 봤어요.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세상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영어였는데 제가 해석을 잘했다면 맞을 거예요. 되게 와닿았어요. <기생충>에서도 나오잖아요. 무계획이 계획이다. 위기 상황 속에서도 농담을 던지고 잠깐이라도 웃자. 숨이 찰 때 웃는 게 심호흡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GQ 코미디 장르에서 놀리는 역할과 당하는 역할이 있잖아요. 어느 쪽인가요?
JW (콧구멍이 커진다) 놀리는 파트요.
GQ 놀림 당할 땐 어때요?
JW 웃기죠. 받아치죠. 팬들이 저한테 대가리가 크다고 ‘하대갈’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승화시키죠. 시골쥐 같다고, 감자 같다고 하면 바로 MD 상품으로 만들어내니까요. 어떤 연예인이 자기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상품을 만들어내겠어요? 장난치고 웃자고 하는 팬들과의 소통의 일환이죠.
GQ 놀리면서도 선은 어떻게 지켜요?
JW 어렵죠. 제가 몇 가지 안 하는 것 중 하나는 외모 비하예요.
GQ 비록 ‘하대갈’이라는 놀림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JW 그렇죠. 저는 스스로 대가리가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괜찮아요. 어쨌든 세상은 자기가 바라보는 것이 기준인 거잖아요. 물론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게 불쾌한 부분이 될 수도 있는 거고요. 농담도 봐 가면서 해야죠.
GQ 오늘 촬영, 느낌 있었나요?
JW 느낌 있었어요. 책 보는 컷도 괜찮았고, 벽에 기댄 컷도 괜찮았고, 복도는 제 취향 아니었어요. 레스토랑에서 찍은 컷도 재밌었고.
GQ 어떤 면이요?
JW 새로운 콘셉트였죠. 고사상에 돼지 머리 올린 것 같은 느낌.(1p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