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고민시 "제 자유를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2021.09.29by 김은희
고민시의 혼잣말.
MS 그때 피자 맛있게 먹었는데.
GQ 기억하시는군요? 우리 언제 만났나 찾아보니 3년 전인 거예요.
MS 허? 3년이나 됐어요? 길어야 1년 전이려나 했는데! 다시 만나 기뻐요.
GQ 저도요. 그사이 우선, 오른팔은 괜찮아요?
MS 오른팔? 저···, 저의 오른팔 왜죠?
GQ <서진이네2>에서 채소 채를 대단히 썰길래요.
MS 아아! 하하하하. 그래서 한국 오자마자···,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언니, 오빠들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한국 오자마자 푹 쉬고 나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작품 공개될 때보다 훨씬 많은 연락을 받았어요. 저도 예능으로 나오는 제 모습을 보니까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처음으로 ‘와, 나 TV 나온다’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내 목소리가 저랬구나. 작품으로 볼 때랑은 너무 다르고, 이건 온전히 정말 인간 고민시를 보여준 느낌이라 벌거벗은 느낌 같기도 하고, 흐흐흥. 그리고 좀 창피했어요. 모든 게 다 들통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GQ 뭐가 들통났지? 바쁜데 화장실 가게 될까 봐 물 한 모금도 먹지 않는 투철함 외에는 아직은 들통난 게 없는 것 같은데요.
MS 그런 저의 급한 성격들. 그게 너무너무 잘 보여서 조금만 더 여유 있게 할 걸 싶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복명복창을 그렇게 많이 하는 줄 몰랐어요. 셰프님이 “이거 올리자” 하면 “어, 올려” 따라 하고 그런, 완전 무의식이었어요. 그런데 예전에 일할 때도 혼잣말을 많이 하긴 했어요. 주변 분들이 “민시 씨 진짜 혼잣말 많이 한다” 하고 알려주셔서 알았어요. 저는 “다음 거 뭐 해야 하지? 이거, 그다음 이거” 이렇게 혼잣말로 내뱉으면서 스스로 체크해야 하는 성격 같더라고요. 그래야 조금 더 효율적으로 빨리빨리 처리할 수 있는.
GQ “예전에 일할 때”라는 건 웨딩 플래너로 일하던 때를 말하는 거죠?
MS 맞아요. 그때나 이후에 서울 와서 아르바이트하고 그랬을 때.
GQ 당시 업무 경험들이 빛을 발하는 건가 싶기도 해요.
MS 그러니까요. 웨딩 플래너로 일할 당시 한 여성으로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로서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거든요. 내가 일해서 내가 쓸 돈을 직접 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일 그만두고 연기하겠다고 서울 올라와서 아르바이트 할 때는, 물론 다 너무 좋은 분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빨리 연기하고 싶은데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나’ 했던,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한참 뒤인 10년이 지난 이제야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같아서 역시 또 한 번 ‘절대 남지 않는 건 없구나’ 느끼고 있어요.
GQ 문득 생각났어요. 3년 전 촬영장에서 민시 씨가 메이크업 받기 전에 눈썹을 손가락으로 가려보길래 물었더니 “곧 눈썹을 밀어야 해서요” 하며 웃던.
MS <밀수>, <밀수>.(박수 치며 웃는다.)
GQ 눈썹이 다시 참 잘 자랐네요. 지금 말하면서 움직이는 눈썹을 보니까 곧 밀어야 한다고 해맑게 말하던 얼굴이 떠올랐어요.
MS 으하하하하. 맞아요. 그때 옥분이 하느라고요. 그 갈매기 눈썹 덕분에 많이 사랑받았죠. 생각보다 눈썹은 금방 자랐어요. 원래 머리 자르고, 눈썹 밀고, 그런 새로운 걸 시도하고 도전하는 데 재미를 느끼는 것 같긴 해요. 저도 모르는 제 얼굴을 알게 해주는 그런 게 되게 재밌는 작업이거든요.
GQ 영영 안 자라면 어쩌려고.
MS 안 자라면 뭐, 어떻게든 어디 가가지고 눈썹 문신이라도 해야지 생각하긴 했어요. 두렵단 생각은 별로.
GQ 뉴욕에는 잘 다녀왔어요?
MS 어, 맞아요. 작년 가을에요.
GQ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낯선 땅 밟기’이고, 그래서 처음 혼자 떠난 뉴욕 여행이고, ‘여행하기’가 아니라 낯선 땅을 밟는다는 표현이 재밌어서요.
MS 아마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일 거예요. 낯선 땅을 밟고 경험한다는 것은 정말 값진 일이라고. 다 같이 갔을 때보다 홀로 낯선 땅을 밟았을 때 오는 어떤 여러 가지 감정이 있더라고요. 저는 원래도 감정 기복이 있는 편인데 혼자 그 넓은 뉴욕 땅을 딱 밟는 순간에는 정말···.
GQ 진짜 혼자 갔어요?
MS 정말 혼자 갔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사진을 더 남기고 싶어서 막 서치해서 포토그래퍼를 만났어요. 저와 나이대가 비슷하고 뉴욕이랑 파리에서 오랫동안 유학 생활 하면서 사진을 찍는 여자분이었는데, 너무 좋은 분이어서 그렇게 또 새로운 인연을 알게 됐고···. 혼자 여행 가서 온전히 모든 감정을 다 느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프기도 많이 아팠어요.
GQ 아팠어요?
MS 감기에 걸려서요. 콧물이 마스크가 다 젖을 정도로 수돗물처럼 흐르는 그런 감기는 태어나서 처음 걸려봤어요. 그래서 약국에 갔는데 그때는 또 영어가 엄청 잘 나오더라고요. 위기 상황이라 생존 본능으로 영어가 막 나오는데 마침 또 50대 백인 남성인 약사분이 한국어를 너무 잘하시는 거예요. “이 약 먹고요, 밥 잘 챙겨 먹고요, 이 약은 한국에 타이레놀 있죠? 그거 같은 거예요.” 부인이 한국인이시래요. 생명의 은인을 만났어요. 그래서 약 먹고 하루 종일 호텔에서 잠만 잔 날도 있고, 비 오는 날 브루클린을 걸으면서 비 내리는 소리도 듣고, 아침에 일어나서 2천원짜리 커피 한 잔 사서 센트럴 파크에 앉아서 청솔모가 나무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보고, 평화롭더라고요.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요거트. 마트에서 파는 요거트인데 아, 이름 까먹었다. 정말 맛있어요.
GQ 며칠을 보내다 온 거예요?
MS 일주일 있었는데, 지금 한 7년 있다 온 것처럼, 흐하하. 정말 큰 도시더라고요.
GQ 낯선 땅을 밟고 돌아오며 가지고 온 것이 있다면요?
MS 음···, 제가 가서 첫날 만난 분이 롤러블레이드를 탄 마티라는 할아버지였어요. 60, 70대 정도의. 그때 센트럴 파크 가기 직전에 길거리에서 캐리커처 그려주시는 데 앉아서 한 7만원 주고 캐리커처를 그렸어요. 그걸 파란 봉투에 넣어주셔서 들고 공원으로 가는데 롤러블레이드를 탄 할아버지가 따라오면서 영어로 뭐라고 막 말을 하시더라고요. 언뜻 듣기로는 “너 아티스트야?” 물어보시는 거예요. ‘뭐야, 어떡해! 나 알아보신 거야?’ 이러면서 “Sorry?” 하고 되물었더니 파란 봉투를 가리키면서 이 아트 산 거냐고 물어보시는 거였더라고요. 그래서 대화하면서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마티가 한국 골프 선수 팬이라면서, 괜찮다면 센트럴 파크에 정말 좋은 곳이 있는데 소개시켜준다고 하셨어요. 평상시 같았으면 사양했을 텐데 그래도 롤러블레이드를 탔으니까 혹시나 이 사람이 허튼짓을 하려고 해도 내가 이것보다 빠르게 뛸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디 가보자 하고 갔죠.
GQ 롤러블레이드보다 빠르게?
MS 저는 막 뛰면 되니까. 롤러블레이드를 탔기 때문에 별로 안 무서웠어요. 인상이 좋으시기도 했고. 그래서 갔는데 정말 아름다운 동화 같은 공간이 나타난 거죠. 어떤 강 같은 곳이었어요. 악기를 연주하는 분들도 계시고, 정말 선물 같았어요. 너무너무 낭만적이었어요. 낯선 땅에 가서 낯선 이와 대화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순간을 만날 수 있었던 게 제가 가져온 것 중 하나 같아요.
GQ 낯섦을 온전히 받아들여서인 것 같아요. 무서워하고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MS 그래서 저는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언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서로 교류하는 무언가가 느껴진다면 그건 훨씬 더 멋진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걸 알았어요. 그 와중에 또 지금 느낀 이런 감정을 연기할 때 꼭 써먹어야지 생각하고.
GQ 며칠 전에 <어느 멋진 아침>을 보았어요. 추천해주신 걸 보고 민시 씨는 이 영화의 무엇이 좋았을지 궁금해서요.
MS 보셨어요?(박수를 두 번 친다.) 저는 그 장면에서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는데 여자 주인공이 아빠 책장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어린 딸에게 말하잖아요.
GQ “요양원의 할아버지보다 이 책에서 할아버지가 더 느껴져. 거기 육체는 껍데기고 이건 영혼이니까.” 이 장면 저도 찍어두었거든요.
MS 그러니까요! 너무 좋죠? 영혼이 담겨 있다···. 그 대사에서 펑펑, 진짜 펑펑 울었어요. 희한하더라고요. 그리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보면 여자 주인공 자리는 그대로이고 어린 딸아이가 있던 위치에 아빠가 등장해요. 마치 이제 막 육체에 무언가가 깃들기 시작하는 어린 딸과, 육체는 사라져가고 대신 다른 데 영혼이 깃들어가는 늙은 아버지로 전환되듯이.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 장면을 저도 녹화하고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가 너무 진중한 것 같아서 혼자 보려고 보관함으로 바꿔두었는데 그 장면이 저도 너무 좋았어요.
GQ 진중한 게 어때서요.
MS 잘 간직해서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드리는 게. 빈 수레가 요란하면 안 되니까.
GQ 전 왜 이런 게 좋을까요. 이렇게 많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고 좋은 이야기들 중에서도 “난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는 매년 여름이 오면, 늘 힘들거나 괴롭거나 혼란스러웠다. 인간의 삶과 소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넥스트 액터 고민시>에 민시 씨가 적은 이런 속내.
MS 오오, 대박! 구매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감동이에요. 맞아요. 무언가 힘들고 속상하고 괴로운 순간은 늘 있는 것 같아요. 하루 중 단 몇 분도 그런 시간이 없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속 얘기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됐어요. 힘든 일을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순간에도 기운이 빠져나가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오늘 힘들었던 거, 그동안 힘들었던 거, 각성하면서 혼자 버텨내는 거, 그런 것들이 쌓였다가도 신기하게 자연스럽게 해소됐다가 또 생기고, 반복되는 것 같더라고요. 혼자 이 안에서 사이클이 계속 도는데, 그럼 과연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본질을 잃지 말자’인 거죠. 제게 본질은 현장이더라고요.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그것 역시 왜인가 생각해보면, 저는 인간 고민시의 삶보다 캐릭터의 삶이 훨씬 재밌어요. 저라는 사람은 좀 고리타분해요. 그런데 배우로서 연기하는 고민시, 캐릭터로서 현장에서 동료들과 일할 때, 무언가 연구할 때, 아이디어가 샘솟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저 이제 비 오는 날도, 여름도 좋아해요. 이상하게 여름과 비는 그 기운이 저를 잡아먹는 것 같아서 힘겨웠는데 재작년에 <밀수> 촬영하면서 정말 좋아졌어요. 그때 삼척에서 여름 내내 촬영하면서 비 내리는 날 우비 입고 언니들과 바닷가 걸을 때, 비 내릴 때 그 향기, 삼척 나무들 향기와 흙 내음과 바다 내음과···, 그 모든 것이 너무너무 좋아서요.
GQ 인간 고민시가 고리타분하다기에는 뉴욕의 맛있는 요거트도 알고, 친구 마티도 있고, 콧물을 수돗물처럼도 흘려봤고···.
MS 어떤 상황들, 제게 닥치는 상황들이 유쾌하고 코미디스러운 경우는 많지만 저 자체로는 되게 재미없어요. 그냥 고리타분하고, 약간 구수한 편이고.
GQ 올해 1월 1일을 스카이다이빙으로 시작한 이유는 뭐예요? SNS에 “눈물도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상공 1만4천 피트”라는 표현이 귀여웠는데, 그 높이가 4천2백67미터이고 지리산이 1천9백15미터더라고요?
MS 허어어억?
GQ 모르고 뛰어내린 거예요?
MS 몰랐어요, 몰랐어요. 그냥 대단히 높구나 했어요.
GQ <지리산> 찍을 때 지리산 정상 등반했잖아요.
MS 죽는 줄 알았어요, 그때.
GQ 그보다 2배 높은 데서 뛰어내린 거예요.
MS 제가 고소공포증이 되게 심하거든요. 그 고소공포증을 던져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동안의 어떤 힘든 것들이 이걸로 “다 날아가 버려라!” 이런 느낌으로 해보고 싶었어요. 그전에는 해보고 싶어도 안 내켰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하고 싶었어요. 제가 연기하고 싶어서 서울로 가야겠다고 딱 마음먹었던 것처럼 이번에야말로 해봐야 될 것 같다 싶어서 했는데, 정말 너무 경이롭고 너무 아름다웠어요. 땅에 착지하자마자 나 올해 뭐든 다 할 수 있다, 어떤 힘든 일도 다 할 수 있다 싶었고, 나는 자연 앞에 한없이 작은 사람이고…, 뒤에 함께 탔던 선생님한테도 정말 감사했어요. 마치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 같다고 해야 할까요? 도전하고 나니까 그 어떤 두려움도 떨쳐낼 수 있었어요.
GQ 남은 버킷리스트로는 무엇이 있어요?
MS 어학 연수가 있습니다. 좀 더 공부하고 한 번 더 저를 채우고 싶은 게 버킷리스트에 있어요.
GQ 두렵진 않아요? 여러 의미로요.
MS 더 넓은 세계로 가고 싶어서. 두려움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