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담아두었다가 20년 후 열어보고 싶은 이야기들. 이미 눈에 밟혀서, 아마 그럴 것 같아서.
인간이 음악에 기대하는 것은 소리만이 아니다. 다른 무언가도 함께 바란다.
그 밑바탕은 역시나 감성, 직관, 철학, 지성, 풍모 등일 것이다.
소리 너머
적지 않은 음악가들은 확신한다. 인공지능은 결코 인간처럼 작곡하고 연주할 수 없다고. 그러나 IT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인공지능의 발전을 옆에서 지켜보는 내 생각은 다르다. 나 또한 음악을 열렬히 즐기는 사람이지만 선뜻 인간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이 세계의 발전 속도는 오늘과 내일이 다를 정도로 빠르고 20년은 제법 긴 시간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근접해 있다. 미세한 터치와 뉘앙스까지 재현해서 인간처럼 감성적으로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가 나왔고,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 작곡 프로그램도 있다.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2016년에 실제 모차르트의 곡과 인공지능이 모차르트를 학습해서 쓴 곡을 나란히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관객에게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 투표하도록 했는데 3분의 1 정도가 인공지능의 곡을 선택했다. 일부 단원은 “언젠가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마저 느꼈다고 한다.
20년 후엔 어떨까? 적어도 귀에 들리는 부분에 한해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라잡거나 뛰어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기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들려달라고 요청하면 즉석에서 그런 곡을 만든 다음 완벽하게 연주해주는 기기. 곡과 연주 모두 최고 수준이고 음향 또한 실제 악기와 흡사하다. 이런 기기가 집집마다 놓이는 미래. 이런 상상이 터무니없는 망상일까?
하지만 정말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해도 인간 음악가의 입지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히 귀에 들리는 소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캐릭터와 오라까지 함께 즐기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를 예로 들어보자. 리흐테르는 경이로운 직관을 바탕으로 같은 악보를 놓고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호로비츠는 어떤 곡을 연주해도 ‘나 호로비츠야!’라며 낄낄 웃는 것 같으며, 켐프는 사색적이고 학구적인 태도로 담담하게 음악의 내면을 탐사한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물론 각자의 삶과 태도, 심지어 외모까지 하나로 묶여서 다가오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된 음악가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우리 마음속에서 그만의 영역을 다진 것이다.
이런 건 차라리 신화에 가깝다. 그리고 인간은 아주 열렬하게 신화를 갈망한다. 수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아마 꽤 높은 확률로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이런 신화적 풍모는 인공지능이 결코 구현할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의 영역이다. 귀에 들리는 소리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이 음악에 기대하는 것은 비단 소리만이 아니다. 다른 무언가도 함께 바란다. 그 밑바탕은 역시나 감성, 직관, 철학, 지성, 풍모 등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음악가가 20년 후에도 살아남을까? 막연히 추측건대 소리뿐 아니라 소리 밖의 영역에서도 강한 설득력을 갖는 인물일 공산이 크다. 다시 말해 신화가 될 수 있는 인물. 20대 젊은 피아니스트를 예로 들면 다닐 트리포노프와 조성진이 떠오른다. 이들은 단순히 연주만 잘하는 게 아니다. 훗날 신화로 진화할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다. 트리포노프 안에는 신들린 듯한 광기가 도사리고 있고, 조성진은 천진난만한 얼굴 이면에 냉철함과 진중함을 숨기고 있다. 지금도 상당한 성과를 쌓아가고 있지만 20년 후엔 일가를 이룰 것으로 기대된다. 홍형진(소설가 겸 음악평론가)
생각 ‘난다’
항아리에 뭔가를 넣고 20년을 기다린다 치자. 그런데 아, 벌써 지겹다, 세월. 서둘러 빨리 늙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 한데 20년 후에 다시 남고, 제대로 남을 게 있을까. 20년 후에 제대로 남을 것이란, 20년 전을 떠올리면 될 일.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아이러니컬하게 나도 등단한 지 20년이 되었고 물론, 곁에 남은 사람 몇 없고, 물건도, 기억도 남은 게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남은 것이 미래에 대한 확신을 준다.
20년 후에도 귀하게 남을 문학 안의 그것은, 출판사 난다다. 난다는 곧 김민정 시인이다. 그러니까 20년 전에도 그녀는 바쁘게 날고 있었다는 것. 하여 지금까지 ‘난다’는 것이다. 등단작 ‘검은 나나의 꿈’을 1999년 <문예중앙>에서 처음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새로웠기 때문이다. 시의 낯선 느낌이 여전하다. 뒤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이상 네 권의 시집을 냈다. 최근에 미국에서 번역 시집이 출간됐다. 그녀의 시 또한 후에 제대로 남을 게 분명하다. 뻔한 이야기이니 이하 생략.
김민정의 출판사 난다는 한결같다. 그녀는 20년 전 <문예중앙>에 있었다. 그 시절의 김민정 시인이 어땠나 하면, 지금과 같았다. 출판 일이라는 게 ‘남의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남의 일은 남의 일로 남는 게 다반사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많이 바쁘고, 또 바빴던 지금과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잘나가는 문인들은 관심 없고 소외되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신인들, 이미 묻힌 사람들을 찾아다녔으니 더 그러하였을 것이다.(완고하기만 했던 시단에서 2000년대에 나온 <문예중앙>의 시선이 주었던 신선함은 지금도 유효하다.) 시단에 숨통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런 쪽이 문학의 편이라고 믿었으니 그랬을 테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의 일’을 놓지 않았으니 그녀는 그렇게 10년을 중앙M&B와 문학동네에서 시집 만들고 책 만들며 일했다.
그리고 2011년 문학동네 임프린트 난다를 시작했다. 그녀가 그래 왔듯이 출판사 난다는 묻히고 처음이며, 사라져가고 잊힌 사람들의 글을 책으로 만들어왔다. 난다의 책은 그래서 짠하고, 따뜻하고, 먹먹하다. 이제는 한눈에 보아도 난다에서 나온 책임을 알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럽고 독특한 개성까지 입고 있다. 故황현산, 故허수경 선생이나 박준 시인의 책이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0년 뒤면 난다가 서른 살 청년이 되는 나이다. 아직도 젊고 한창 때일 난다, 책에 대해 사람에 대해 앞으로도 한결같을 것이다. 그 마음이 귀하게 남을 것이다. 백가흠(소설가)
나는 너를 만지지 않고, 더 어렵게 느끼면서 이 관계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게 가까스로 가능해진 다음 날은 어떨까.
거리 두기, 너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윤리
HBO 드라마 <체르노빌>에는 한 병원에 숨어든 임산부가 나온다. 그를 맞닥뜨린 간호사가 돌아가라고 하지만 소용없다. 여자는 피폭된 남편을 반드시 만나길 원한다. 접촉을 우려하는 건 세상의 말이고 둘의 세상에서 그런 말은 부서진다. 이들의 포옹은 실제로 숭고해 보인다.
친밀한 대상 가까이 가고 싶다는 바람은 우리의 지독한 본성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고결한 속성일까. 어딘가로 직진하는 인물의 절박한 감정은 보통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다. 그 욕망이 당연해 보였으니까.
단념과 포기가 사랑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은 우리 곁에 늦게 도착한다. 누군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인식은 재난을 통과하며 공유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가공의 약속이 앞으로도 깨지지 않고 굳건하길 바란다. 전염병이 지나가더라도. 수십 년, 아니 몇 세기가 흘러도.
원거리 대화는 줄곧 차선책이 되곤 했다. 남에게 섣불리 붙지 않는 태도 역시 비인간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우린 교감에 촉각이 늘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어떤 이를 고유한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그와 떨어져 있을 때라는 것도. 너를 안다고 믿는 대신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침범과 훼손을 줄이고 각자의 공간에서 되도록 선량해지는 것, 표정과 감정을 천천히 번역하는 것. 긴 터널 안에서는 태양 대신 다른 빛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스크를 쓰면서 가장 오래 보는 게 앞 사람의 눈인 것처럼.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던 경험이 드물진 않다. 책, 영화, 음악부터가 다른 시공간을 담은 여행기이니까. 통신망을 포함해 비대면 채널, 홀로그램, AR 등 교류를 돕는 기술도 무수하다. 어쩌면 나는 너를 만지지 않고, 더 어렵게 느끼면서 이 관계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게 가까스로 가능해진 다음 날, 그다음 날은 어떨까. 거리 두기가 자리를 고루 나눠 쓴다는 의미로 확장된다면.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차지하던 영역을 둘러보게 된다면. 혹시라도 내 것 아닌 통증에 더 민감해질 수 있다면.
그때 우린 비인간을 발치 앞에 끌고 오는 일을 체험이나 축제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동물원이라는 단어는 동물 스스로 갇혔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만큼 광활한 대지를 뜻하게 될 것이다. 케이블카와 송전탑이 넝쿨로 뒤덮이는 동안 학대의 개념과 범위는 더 넓어질 것이다. 가능한 일이다. 인간이 동식물을 데이터로 만난다면 동식물도 인간을 데이터로 만날 수 있다.
나는 모든 종의 언어를 통역하는 작은 기기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서로 다른 언어의 변환 결과가 질감으로 색깔로 또는 무늬로도 나타나면 좋겠다. 거리를 벌리는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미지를 그리는 마음도 정교해질 테니까. 박문영(SF 작가)
그런 픽사가 있다는 것
1995년에 개봉한 <토이 스토리>는 영화 역사상 최초의 3D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픽사의 23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소울>은 픽사가 선사하는 최신의 절정이다.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 <라따뚜이>, <월-E>, <업>, <인사이드 아웃>, <코코> 등 픽사의 이름을 건 작품들은 기술과 예술이 맞물려 이루는 감동의 경지를 거듭 넓혀왔다.
2015년 한 해에만 8억 6천7백5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작으로 호명된 <인사이드 아웃>의 감독 피트 닥터는 큰 성공과 영예를 얻었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느꼈다. 인생이 그저 성공이라는 수사만으로 충만해지지 않음을 실감한다. 삶이 꿈을 위한 담보가 아닌, 꿈을 품은 여정 그 자체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소울>을 위한 영감으로 구체화됐다.
픽사는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일 수도 있었다. 1974년, 뉴욕 공과대학 컴퓨터 그래픽스 연구소 소장이 된 에드윈 캐트멀이 CG를 이용한 3D 애니메이션에 대한 꿈을 품지 않았다면, 디즈니 애니메이터였던 존 래시터가 CG를 활용한 애니메이션 작업에 열망을 갖지 않았다면, 픽사도, <소울>도 없는 21세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컴퓨터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망상이었던 시대에 품은 꿈을 내일로 밀고 나갔다.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로 자리할 당시, 에드윈 캐트멀은 불필요해 보이는 애니메이터들을 해고하려 하는 조지 루카스를 막고자 안간힘을 썼다. 컴퓨터 그래픽 산업에 흥미를 느낀 스티브 잡스가
픽사를 인수한 뒤 막대한 투자비용에 부담을 느끼자 끊임없이 자신들의 비전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그리고 끝내 픽사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 이름이 몽상가들의 것이 아닌, 혁신가들의 것임을 증명했다. 그들의 혁신은 결국 기술적 성취를 넘어선 예술적 경지를 염원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기술적 성취가 멋진 이야기를 위한 토대임을 증명한 작품을 연이어 선보이며 세계의 열광 속에서 거듭 성장해나갔다.
<토이 스토리>로 시작한 픽사의 모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울>은 픽사가 발견한 새로운 영토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실제로 일이 생길 것이다.” 에드윈 캐트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구별하는 대신,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이름이 됐다. 그리고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라는 <토이 스토리>의 도전적인 대사는 오늘날 “매 순간을 살아가자”는 낭만적인 울림으로 진화했다. 20세기에 품었던 픽사의 꿈은 21세기에 보다 선명해졌다. 룩소 주니어의 점프로 시작하는 픽사의 영화는 언제나 낭만과 감동으로 도약한다. 20년 전에도 그러했듯, 20년 후에도 그 점프는 유효한 꿈일 것이다. 그런 픽사가 있을 것이란 기대만으로도 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인류의 돌림노래, 꼰대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유재석은 Z세대 ‘자기님’에게 ‘어른과 꼰대의 차이’를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어른이 되면 꼰대가 된다”였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친구가 그냥 가볍게 던진 말 같지만 곱씹어볼수록 묵직함이 느껴지는 현답이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면 꼰대가 된다.
스페인 프란체스코회 사제였던 알바루스 펠라기우스는 1311년, “요즘 대학생들이 선생 위에 서고 싶어 한다”며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7년(1691년) 8월 10일 첫 번째 기사에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다”고 혀를 차는 대목이 나온다. 태고의 벽화에 “요즘 애들 버릇없다”고 적혀 있었다는 ‘썰’까지 나돌 정도로 이전 세대는 항상 지금 세대를 못마땅해했다. 그리고 지금 세대는 이전 세대를 ‘꼰대’라고 부르며 자신들과 선을 그어왔다. 세대와 세대 간의 불통과 편견은 인류의 역사 내내 반복되고 있다. 꼰대는 청소년들이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키는 은어로 사용되다, 구태의연한 자신의 사고방식을 남에게 강요하는 나이 많은 사람이나 직장 상사를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최근 BBC에서는 ‘kkondae’라는 단어를 그대로 표기해 직장 내 ‘코리안 꼰대’를 명문화했다.
급기야 요즘엔 ‘젊은 꼰대’라는 말로 범위가 넓어지기까지 했다. 예전엔 한 세대를 걸러 나타났던 꼰대가 이제는 다섯 살 이상만 많아도 선배의 탈을 쓰고 등장한다. 학교나 직장에서 선배라기보다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애매한 연장자, 하지만 중장년보다는 어린 축에 속하는 사람을 일명 ‘젊꼰’이라 부른다. 주로 “나 정도면 꼰대 아니지?”라고 물으며 “너네는 젊어서 좋겠다” 같은 추임새를 자주 쓰는 형태로 나타난다. ‘나 때는 말이야’가 ‘라떼는 말이야’로 변형되어 구전되듯, 꼰대는 그 모양이 조금씩 달라질 뿐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존재할 거다.
그런데 꼰대를 기피하고 꼰대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반대 축에 오히려 본인이 꼰대임을 인정하는 무리들도 보인다. 이미 도끼는 ‘힙합 꼰대’라는 곡으로 “랩의 리을도 모르는 놈들”을 비판한 바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그래, 나 꼰대다’라고 인정해버리는 순간, 세대 간 갈등의 불씨처럼 통용되던 꼰대의 의미는 달라진다. 낡아빠진 생각을 강요하는 꼰대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온 방식을 리스펙트 받는 꼰대. 그래서 2041년, 빅나티와 김하온의 랩으로 ‘고등래퍼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2000년대생 꼰대들은 후세대에게 ‘일과 인생에서 원리원칙을 갖고 그걸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로 재해석될지 모르겠다. 서동현(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운전이라는 행위 사이, 문득 찾아오는 물아일체의 온전한 몰입감이 주는
명상 같은 순간이 사라진다면 그걸 ‘운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운전이라는 울퉁불퉁한 감각
휘발유를 기세 좋게 태우는 내연기관 자동차에 올라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순간은 평범한 인간이 짐승을 길들이는 마음으로 기계와 몸을 섞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그게 꼭 최신형 포르셰는 아닐지라도, 인간이 만든 모든 피조물 가운데 동물적인 흥분감과 요람 같은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 네 발 달린 내연기관 자동차의 운전석이라는 게 나름의 지론이다. 아무리 낡고 못난 자동차라 해도 홀로 음악을 들으며 떠나는 새벽의 운전석은 숭고한 결계가 되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모든 순간의 진동은 일종의 스포츠다. 어둑한 도로 위에 깔린 진공 같은 습기를 차체로 묵직하게 가르는 촉감은 그대로 명상이다. 자동차와 운전에 관한 이런 인류 최초의 감각을 전기 자동차라는 장르로는 결단코 대체할 수 없을 것이며, 길 떠나는 인간은 언제고 반드시 그 울퉁불퉁한 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수년 전 테슬라 모델 S의 조수석에 앉았던 순간부터 몇달 전 모델 3의 운전석에 몸을 실은 순간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모델 3를 예약하고 보무도 당당히 들어간 제주도의 어느 렌터카 회사 주차장. 지성인답게 유튜브로 미리 숙지한 덕에 자연스럽게 시동을 걸고 시트를 맞추고 에어컨 설정과 블루투스 연결까지 일사천리로 성공했다. 최신 모델 아이폰처럼 똘똘하기 그지없어진 인터페이스가 썩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도로 위로 나가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순간, 내 시선과 손끝은 곧 황망하게 비상등 버튼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알아서는 안 될 것에 손을 댄 것 같은 그 위화감이라니.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휑하게 덜어진 듯한 알 수 없는 그 감각을 무어라 불러야 마땅할지 지금도 생각한다. 미묘하게 낯선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 핸들의 작동 방식과 진동도 소음도 없는 미끈한 승차감. 그건 운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마땅할 것 같았다. ‘조작’이랄지 ‘탑승’ 같은.
물론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는 것에 딱히 불만은 없다, 라기 보다 그건 누군가의 운전 취향 따위와는 상관없이 이미 예고된 미래다. 유럽이 가장 먼저 디젤과 가솔린, LPG와 같은 내연기관을 버렸다. 노르웨이에서는 2025년, 네덜란드에서는 2030년 이후 배출가스가 없는 자동차만 판매된다. 영국은 공해를 발생시키는 차량은 운행할 수 없는 제한 지역을 만들었고, 2040년부터 모든 화석연료 자동차의 판매를 금지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주요 도심에 경유차 진입 금지 구역을 확대하고 있다. 환경 정책적인 담론이 아니더라도, 점점 참을성이 없어지는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면 대중 여객, 화물 운송, 출퇴근 시각 소시민의 발이 되어줄 일상의 평범한 운송수단은 소음도 공해도 집중의 피로감도 덜어진 전기차로 대체되어 가는 것이 현명하고 타당하다. 테슬라가 ‘800슬라’ 되기 전 초보 개미로 시장에 들어가 어부지리의 재미를 보고 있는 많은 평범한 소시민들도 ‘모르겠고 여하튼 전기차는 인류의 미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대열엔 필자도 포함된다. 그래도 생각한다. 운전이라는 행위와 행위 사이, 문득 찾아오는 물아일체의 온전한 몰입감이 주는 명상 같은 순간이 사라진다면 그때도 그걸 ‘운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언어 속 ‘운전’은 땀 냄새와 근육통을 수반하는 어떤 능동적이고 동물적인 감각인데 말이다.
이제 20년 이내로 지구상의 내연기관 자동차 대부분이 예정된 멸종의 길을 걷겠지만, 한편으로 인류는 그것이 주는 특유의 향수를 하나의 독특한 장르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선택된 소수의 아이콘들은 클래식이 되어 살아남을지 모른다. 그러니 지켜볼 일이다. 진공으로 빨려 들어가듯 돌진하는 타이칸 4S와 1967년식 쉐보레 임팔라는 다프트 펑크와 리틀 리처드처럼 그저 아예 다른 장르니까. 유희영(크리에이티브 컨설팅 에이전시 JAD 콘텐츠 디렉터)
왼발의 마법, 왼발의 역사
국가대표팀에서 염기훈에 대한 평가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체돼 있다. 2010 남아공월드컵 아르헨티나전의 그 왼발 슈팅 하나로 여전히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K리그에서 보여온 모습은 존경 그 자체다. K리그에서 보여준 염기훈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나고 있으며, 아마 20년 후쯤이면 더 고고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2006년 전북현대에서 프로로 데뷔해 울산현대를 거쳐 2010년부터 수원삼성 유니폼을 입고 뛰는 염기훈은 K리그 통산 396경기에서 76골과 110개의 도움을 작성했다. 이 396경기 중 수원에서만 무려 363경기에 출전해 70골 117개의 도움을 올렸다. K리그 최다 도움 기록도 염기훈이 보유하고 있다. K리그에서 가장 충성심이 높은 팬들을 보유한 수원의 살아 있는 역사다. 염기훈은 수원에서만 7차례 팀의 주장을 맡았다.
내년에도 수원 소속으로 K리그1에서 뛰게 된 그는 K리그 최초 80-80클럽 가입과 함께 K리그 400경기 출전, K리그 최다 프리킥 골(현재 에닝요와 공동 1위) 등 새로운 기록 달성에 도전한다. 설령 기록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도 이미 그는 K리그 최정상에 위치한 선수다. 차범근이나 손흥민, 박지성은 누구나 다 아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선수였지만 염기훈은 조금 다르다. 기량에 비해 심하게 평가 절하돼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 인정받을 수 있다. 염기훈은 아르헨티나전의 슈팅 한 번으로 너무 낮게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축구붐’이 일면서 K리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니 염기훈에 관한 기록, 그가 보여준 경기력은 앞으로 충분히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K리그에서 단기간 강렬한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는 많지만 이렇게 한 팀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오랜 세월 활약하는 선수는 몇 없다. 더군다나 그 팀이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수원이라면 더더욱 대단한 일이다.
염기훈은 이미 A급 지도자 자격증까지 획득했다. 현역 선수 중 A급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한 선수는 염기훈과 최효진(전남)이 유이하다. 최효진이 올 시즌 플레잉코치로 전향했으니 순수한 필드 플레이어 중에는 염기훈만이 이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A급 자격증을 따내고 5년간 활동해야 프로 감독으로서의 자격증 획득 기회가 주어질 만큼 프로 감독이 되는 건 어렵다. 하지만 염기훈은 벌써부터 감독이 되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 중이다. 적어도 20년 안에 그가 수원삼성 감독으로 벤치를 지키는 일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벌써 평가할 순 없지만 수원에서 레전드가 된 선수가 감독이 돼 ‘빅버드’에 선다는 건 그 자체로도 한국 축구의 새로운 역사다. 염기훈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빛날 것이다. 그만한 선수가 없다는 걸 K리그 팬들은 너무 잘 안다. 김현회(스포츠 칼럼니스트)